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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강 슈트릭

2024년 11월 28일 뉴욕타임즈에 올라온 크리스토퍼 콜드웰의 에세이 <This Maverick Thinker Is the Karl Marx of Our Time>는 뉴레프트저널에 기고한 에세이들로 유명한 독일의 사회경제학자 볼프강 슈트릭를 매우 상세히 소개한다.

슈트릭은 신자유주의 기획에 내포된 역설에 대해 명확한 통찰을 제시한다. 글로벌 경제가 “자유롭기” 위해서는 오히려 제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옹호자들이 말하는 자유 시장이란 규제가 완화된 시장을 의미한다. 그러나 탈규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보기보다 훨씬 복잡하다. 자유로운 사회에서 규제란 인민들이 자율적으로 규칙을 제정할 수 있는 주권적 권리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세계의 사회가 민주적일수록 그 사회의 특성이 독특해지며, 경제적 규칙들이 서로 달라질 가능성이 커진다. 하지만 기업들은 적어도 글로벌화 측면에서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 자본과 상품은 국경을 넘어 마찰 없이 효율적으로 이동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일관된 법체계가 필요하다. 결국 민주주의는 일정 부분 양보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민주주의와 글로벌 자본주의가 일으키는 모순은 제국주의의 횡포로 이어지게 되는데, 제국 수준에서 일어나는 일이 글로벌화 규칙을 만드는 미국과 서유럽 사회 내의 지역 수준에서도 발생한다. 민주주의와 대립하는 경제 정책들이 수립되고 불공정한 결과를 만들어 낸다.

“글로벌 경제”는 일반 대중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공간이다. 슈트릭은 1970년대 이후 좌파 정당들이 이러한 문제를 간과했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산업 노동자를 중심으로 노동자 권리와 생활 수준을 주된 관심사로 삼았던 기존의 구조에 인권과 ‘깨어있는 정신'(wokeism)이라는 원칙 집합과 같은 가치 체계를 홍보하는 데 관심을 둔 지식인들이 침투하여 전복시키는 것을 허용했다.

슈트릭은 민주주의를 옹호한다고 주장하는 엘리트들에 의해 민주주의가 저지되고 있기 때문에 위기에 처했지만 일반 대중 사이에서는 민주주의가 활발히 살아 있다고 본다. 지난 20년 동안 적어도 진정한 대중의 정서를 반영하는 후보를 내세우는 정당의 경우 투표 참여율이 가파르고 꾸준히 상승했음을 지적한다.

좌파는 포퓰리즘을 받아들여야 한다. 포퓰리즘은 단지 글로벌리즘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는 투쟁에 붙여진 이름일 뿐이다. 글러벌리즘이 스스로의 모순에 의해 붕괴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제 모든 진지한 정치적 움직임은 어떤 형태로든 포퓰리즘적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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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의 정신분석

에릭 프랭크 러셀의 짧은 단편 <The Sole Solution>을 슬라보예 지젝이 인용하길래 찾아봤다.

https://archive.org/details/Fantastic_Universe_v05n03_1956-04/page/n109/mode/2up

그는 어둠 속에서 곱씹었다. 그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떤 목소리도, 속삭임도, 손길도 없었다. 다른 존재의 온기도 없었다. 어둠. 고독. 온통 검고 고요하며 아무것도 섞이지 않는 데서 오는 영원한 얽매임. 사전 정죄 없는 감금. 죄 없는 형벌. 벗어날 방법을 찾아내지 않는 한 견뎌야만 하는 견딜 수 없음. 바깥에서 오는 구출의 희망이란 없다. 다른 영혼, 다른 마음에 슬픔이나 연민, 동정이란 없다.

그리하여 그는 해법을 꿈꾼다.

가장 쉬운 탈출은 상상을 이용하는 것이다. 구속복에 갇힌 이는 자신만의 꿈나라를 모험하며 신체의 덫에서 탈출한다. 하지만 꿈으로는 충분치 않다. 꿈은 현실이 아니고 지나치게 짧기 때문이다. 얻어내야 할 자유는 진짜여야 하고 오래도록 지속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꿈에서 엄정한 현실, 영원히 지속될 만큼 치밀하게 만들어진 현실을 만들어야 했다.

모든 세부 사항을 계획하는 오랜 노력 끝에 실천할 때가 도래했다.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다. 실험을 시작해야 한다. 그는 고개를 앞으로 숙이고 어둠을 응시하며 말했다. “빛이 있으라.” 그러자 빛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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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C

벨마, 오즈

레딧에 올라온 매우 흥미로운 (Velma characters parallel wizard of oz).

벨마의 빨간 메리 제인
도로시 → 벨마의 빨간 메리 제인 한 켤레
여성성의 신화를 읽는 프레드
허수아비 → 여성성의 신화를 읽고 뇌를 얻는 프레드
스스로에게 헌신하기로 결단하는 노빌
사자 → 스스로에게 헌신하기로 결단함으로써 용기를 얻는 노빌
양철나무꾼: 대프니
양철나무꾼 → 벨마와 키스함으로써 사랑을 얻은 대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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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로소득

불로소득이 고생하지 않고 공짜로 벌어서 문제인 것이 아니듯이, 고생해서 벌었다고 임금 노동이 정당한 것도 아니다. 임금 노동과 근로소득에만 집중하면 능력주의에 따른 소득 격차를 정당화하고, 어린이·노인·장애인 등 노동 능력이 모자란다고 여겨지는 이들에 대한 차별로 이어질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불로소득이 필요하다. 사회의 공적 절차를 통한 복지 급여가, 꼭 현금 급여가 아니어도 주거, 교육, 의료 등을 보장하는 ‘사회임금’이 필요하다. 장애운동에서는 ‘개인이 지닌 현재의 조건 및 능력에 비춰 볼 때 그 활동이 사회 구성원의 물질적, 정서적, 정신적 삶에 기여하는가’를 기준으로 공공시민노동을 개념화하고 소득을 지급하자고 제안한다. 이렇게 보면 존재 자체,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 자체가 노동이다. 노동과 소득을 사회적 관계에서 인식하고, 존재 자체의 가치를 인정하는 데서부터 불로소득을 극복하는 힘이 나올 것이다.

공현, <불로소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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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log ETC

아바타, 추억

제임스 캐머런의 아바타를 당시 회사 근처 개봉관에서 보았던 기억이 망령처럼 떠올랐다. 2009년 12월, 추웠지만 두근거렸고 끝내 슬퍼졌던 그날 밤, 피곤한 남자에겐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없었다. 가까운 곳에 앉았지만, 푸른 거인들이 뛰어다니는 스크린은 너무나 멀어 보였다. 미래에서 온 나의 유령과 만나는 내 과거의 유령을 보았다. 시끄럽고 어지러운 환상들이 배회하는 공간에서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우리의 심장은 함께 뛰었고 시공간의 온도를 미세하게 높였다. 붙잡고 싶었고 뿌리치고 싶었다. 수수께끼 같은 인사를, 거짓말을 나누면서 우리는 판도라 행성을 떠났다. 우리가 잠시 그 자리에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끝을 향해 지나온 길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보낼 수 없었던 답장은 어느 버려진 서버에 절절한 이진 코드로 남았다가 무신경한 다른 코드가 덮어썼을 것이다. 미안한 마음은 전할 길이 없다. 그래서 삶이 종종 아프고 외로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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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괴암

나는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모순은 서울 중심주의, 수도권 중심주의라고 생각한다. 주요 모순, 근본 모순이다. 계급, 젠더, 부동산, 교육, 정치, 의료 등 모든 문제가 여기서 나온다. 말할 것도 없이 보이는 권력, 보이지 않는 권력, 문화, 사람, 금융, 일자리 등 모든 자원이 서울에 있다. 집중이 아니다. ‘그냥 다 있다’. 이른바 진보 인사, 맑스주의자, 페미니스트들도 거의 서울에 산다.

정희진, 「일괴암一塊岩의 공포, 서울 이야기」, 『뉴 레디컬 리뷰』 제2권 제3호, p. 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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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C Film

벨마, 민디 케일링

오랜만에 만들어 본 자막은 구글 드라이브 로 관리.

Velma의 제작에 깊이 관여한 대표적 인물 중 한 명이 바로 벨마의 목소리를 연기한 민디 케일링. 전설의 시트콤 The Office 제작에 작가이자 배우,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IMDB에는 흥미로운 인터뷰의 일부가 소개되어 있다. 2005년 The Office 제작 당시, 14명의 스태프 중 단 2명의 여성 작가 중 하나로서 다음과 같은 소감을 밝히고 있다.

모든 남자들이 저와 항상 섹스하고 싶어해요. 매일 출근할 때마다 성희롱이 끊이지 않아요. 제너럴 일렉트릭에서 찾아온 사람들에게 얘기를 해야 했어요. 곧 소송이 시작될 거예요. 하지만 그 외에는 정말 좋았어요.

민디 케일링의 경력을 요약,

  • 다트머스 대학 2학년, 코난 오브라이언 심야 토크쇼에서 인턴.
  • 대학 졸업 후 브루클린으로 옮겨 가 스탠드 업 코미디.
  • 2002년 맷 데이먼과 벤 애플렉이 굿 윌 헌팅을 쓰게 된 과정을 재구성한 코미디 Matt & Ben 집필 및 공연.
  • 2004년 디 오피스의 작가로 합류, 초기에는 스태프가 8명이었고 케일링이 유일한 여성이었음. 두 번째 에피소드부터는 켈리 카푸어로 직접 출연.
  • 2011년 The Office 시즌 8 총괄 프로듀서로 승진.
  • 2011년 첫 회고록, 나 없이 다들 잘 지내나요? 출간, 5주 동안 뉴욕 타임즈 베스트셀러.
  • 2012년 민디 프로젝트 각본, 제작, 주연. 벨마의 총괄 프로듀서인 찰리 그랜디는 디 오피스의 동료 작가였고 민디 프로젝트에서도 호흡을 맞춤.
  • 2013년 타임 지의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100인 목록에 오름.
  • 2015년 두 번째 회고록이자 유머 에세이 왜 나는 안 되나요? 출간, 16주 동안 뉴욕 타임즈 베스트셀러.
  • 몇몇 애니메이션에서 성우로 활약.
  • 2018년 영화 시간의 주름에 출연.
  • 2020년 세 번째 회고록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끔은 예외) 출간.
  • 2021년 HBO Max의 성인용 애니메이션 시리즈인 벨마의 총괄 프로듀서, 성우로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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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C

Velma

Velma 투표 상세

첫 시즌 네 개의 에피소드가 방영된 Velma에 대한 박한 별점은 분노 표출에 가깝게 보인다. 투표에 참여한 사용자 중 절대 다수가 가장 낮은 점수를 주었다. 나머지 사용자 중 가장 큰 그룹이 만점에 투표했는데 아마도 무너지는 평점에 대한 안타까움을 담았을 것이다. 이런 정도라면 평점이 이 작품의 내적인 평가를 반영한다고 보기 힘들다. 물론 사용자 평점이란 원래 그런 것이지만… 다만 어떤 점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더 나아가 분노하게 되었는지 살펴보고 싶어진다. 원작이라 할 수 있는 스쿠비두 시리즈에 별다른 애정이 없는 나에게는 매우 훌륭한, 적어도 별점 8개 정도는 주고 싶은 스핀오프 쇼이기 때문이다.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과 재치있는 대사들, 장르에 충실한 유머들, 배경에서 흐르는 연쇄살인 플롯, 캐릭터들 간의 갈등과 캐미, 그리고 성장… 네 개의 에피소드만 봤지만 아무리 박하게 평가해도 꽤 잘 만든 쇼이다. 벨마와 대프니, 노빌이 소수 인종이고 프레드만 백인으로 재설정된 점이 어느 정도나 평점 테러에 영향을 미친 것인지도 궁금하고, 노골적으로 부각되는 페미니즘, LGBTQ 와의 관련성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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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itics

사민당, 우생학

1934~1974년, 스웨덴은 의학적, 우생학적, 윤리학적 이유 등 다양한 이유를 내세워 ‘일탈자’로 분류된 사람들을 대상으로 불임 정책을 추진했다. 정신병자나, ‘정신적으로 취약한 이들’이 재생산되지 못하게 막는다는 취지였다. 여기서 ‘정신적으로 취약한 이들’이란 바로 어머니가 될 자격이 없는 ‘타락한’ 삶을 사는 성적으로 방만한 여성들을 의미했다. 이런 식으로 40여 년에 걸쳐 강제 불임시술을 받은 사람이 무려 6만 3,000명이 넘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172호, <스웨덴식 노스탤지어, 정권창출 방정식>, 비올레트 고아랑.

그러니까 사민당 집권 기간에 이런 일이 벌어졌던 것.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사민당 정치인 군나르 뮈르달은 스웨덴이 ‘외국인 이민자들의 물결에 잠식’되고 말 것이라는 이유로 출산 제한 정책에 비판적이었다고 한다. 최근에 읽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의 공포스러운 대목들이 다시금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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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Review

가사, 돌봄노동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는 반려자인 메리 번즈Mary Burns의 사망 후, 메리의 여동생 리디아와 살았다. 리디아마저 죽은 후에는 마르크스 집안의 하녀였던 헬렌 데무스Helene Demuth가 엥겔스를 돌보았다. 헬렌 데무스가 죽은 후에는 독일사회민주당의 지도자들이 엥겔스를 돌보는 사람으로 루이제 카우츠키Luise Kautsky를 지정했다. 마르크스의 딸인 엘리노어 마르크스Eleanor Marx는 당시 이에 분개했다.

이라영, <<정치적인 식탁>>, <혼자 못 사는 남자들>

이 대목을 읽고 자크 아탈리의 마르크스 평전이 생각나서 뒤적여 봤다.

11월 18일, 헬레나 데무트가 암으로 죽는다. 마르크스와 예니가 바랐던 대로 그녀도 하이게이트 묘지에 있는 마르크스일가의 무덤 안에서 마르크스부부와 어린 해리 곁에 매장되었다. 나흘 뒤 엥겔스는 차티스트주의자들의 오랜신문에다 그녀에 관해 쓴다.

“마르크스가 죽은 이후에도 내가 일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대부분 집에 있는 그녀의 존재가 가져다 준 햇빛과 후원 덕분이었다.”

자크 아탈리, <<마르크스 평전>>, p.644.

헬레나 데무트는 예니의 하녀였을 뿐 아니라 마르크스의 원고들을 정리하는 일도 도왔다.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헬레나는 마르크스의 아들을 낳기도 했다. 정확히 서술하자면, 예니가 장기간 집을 비웠을 때 덜컥 임신하고 결국 아들을 낳았지만 누구의 아들인지는 끝까지 털어놓지 않았다. 정황상 마르크스의 아들임이 분명한데 난처해진 친구를 끔찍히도 생각하는 엥겔스가 끝까지 자신의 아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그런 뻔한 거짓말에 속을 사람이 아니었으나 예니도 끝내는 마르크스를 용서했던 것 같다. 마르크스 가족과 엥겔스는 헬레나를 단순한 하녀가 아닌 진정한 가족으로 여겼고 마르크스 사후 엥겔스의 집으로 옮겨간 것도 경제적인 이유와 더불어 마르크스의 방대한 유고를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엥겔스는 헬레나의 죽음을 진정으로 슬퍼했던 것 같다.

F. 레스너라는 한 증인은 같은 사실을 다르게 소개한다.

“헬레나 데무트를 잃게 된 것이 엥겔스로서는 아주 고통스러웠다. 다행히도 얼마 안 가서 루이제 카우츠키, 오늘날에는 프라이베르거 부인이 된 그녀가 빈을 떠나 런던으로 와서 앵겔스의 집을 관리하기로 결정했다.”

같은 책, p.645.

루이제 카우츠키가 엥겔스의 집으로 들어가게 된 배경도 사실 그리 단순하지는 않다. 독일 사회민주당 내의 정치투쟁과 관련되어 있다. 당시 마르크스를 비판하던 베른슈타인이 선점하기 전에 자신의 세력을 보내고 싶었던 베벨과 리프크네히트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였다. 마르크스의 딸 엘레아노르는 루이제 카우츠키와 그녀의 새 남편 프라이베르거가 아버지의 지적 유산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상황을 걱정했던 것 같다.

프라이베르거 부부는 엥겔스의 집 일부를 차지하고, 그 집에다 자기네 이름까지 갖다 붙이고, 전에 카우츠키 부부가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엥겔스를 자기네 지배 아래에 붙잡아두고 있는 듯했다. 엘레아노르는 자기 언니에게 이런 상황에 대해 터놓고 얘기했다.

같은 책, p.651.

이렇게 써놓고 보니 이라영 선생님이 제기한 문제를 흐리는 서술이 되어버렸다. 당시 상황을 조금 더 상세히 바라보고 싶었다. 분명히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당시 대부분의 남성들이 그러했듯이 가사노동을 여성의 일로 여겼고 평생 여성들의 돌봄에 의지하며 살았다. 급진적인 지식인의 대명사 같은 존재들도 일상 속에서는 가부장제가 정한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다. 화담 서경석의 일화는 더 직설적이다. 허균의 아버지인 허엽이 스승이었던 서경석의 별장에 찾아가 하인을 시켜 밥을 짓게 하려다 보니 솥 안에 이끼가 가득해서 까닭을 물었고, 서경석이 이렇게 대답했다는 것이다. “물이 막혀서 엿새를 집사람이 오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오랜 동안 식사를 못하였다. 그러니 분명 솥에 이끼가 끼었을 것이다.” 아내가 없으면 밥을 굶고 이를 당연하고도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바라보았던 시절, 참으로 미개했던 시절이다, 라고 끝내면 좋겠지만 슬프게도 오늘날과 무관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른 방식으로 밥 타령을 한다. 집밥의 가치에 대해 지겹도록 말하다가 이제는 홀로 밥 먹는 남성에 대한 연민으로 어쩔 줄 몰라 한다. 혼자 밥 잘 해먹는 남자들도 많은데, 이런 남자들은 보편적이지 않은 사례라며 밀어내려 한다. ‘남성연대’는 주방에 자주 들락거리는 ‘같은 남자’들을 싫어한다. 가부장제는 여성들이 하던 성 역할에 참여하는 남성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런 남자들이 많아질수록 성 역할이 깨지기 때문이다.

이라영, 같은 책.

지식은 확실히 세상을 바라보는 감각의 해상도를 높힌다. 흐릿한 실루엣으로 보이던 부분을 더 선명히 파악할 수 있게 되는 계기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