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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itics Quote

포스트 87

<참여사회> Vol.324에 실린 최성용의 글 ‘언어와 주체의 갱신: 12월 3일 이후의 세계’에 따르면 2024년 광장은 광장의 계보 위에서 두 가지가 변별된다. 우선 민주당과 광장 사이 ‘미싱링크’가 발생했는데 이는 민주-진보연합이 불가역적으로 파열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두 번째는 시민들이 기존의 사회운동과 긴밀하게 ‘링크’되고 있다는 것인데, (이러한 관점이 엄밀한 분석에 기댄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이를 전개하여 새로운 운동의 주체를 발견한다.

다른 하나는 1987년 직후 노동운동이나 시민운동의 발전 및 형성에 비견되는, 사회운동의 집단적 주체가 형성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 이전의 촛불 광장에서도 새롭게 운동에 진입하는 이들은 늘 존재했지만, 현재의 ‘말벌 동지’들은 페미니즘을 비롯해 시민사회의 기성세대와 일정하게 단절적인 사상과 의제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기존 사회운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또한 비상행동 내에서도 젊은 활동가들은 이전과 달리 평등하고 시민들에게 반응적인 광장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다. 서로 연결되고 집단적인 경험을 공유한 활동가들은 그간 침체된 시민사회에 새로운 흐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양상들이 장기적인 정치적 변화로 이어질 것이라 기대한다. 나는 포스트 1987년 체제의 가능성이 여기에 있다고 믿는다.

아라빈드 아디가의 <화이트 타이거>에 나오는 인상적인 시구가 떠오른다.

세상의 실로 아름다운 것을 목도하는 순간 사람은 노예가 되길 멈춘다.1이 번역은 넷플릭스의 영화판본에서 가져온 것이며, 베가북스의 한국어판은 같은 시구를 다소 실망스럽게 번역하고 있다: “그들은 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노예로 남아있다.”

footnote
  • 1
    이 번역은 넷플릭스의 영화판본에서 가져온 것이며, 베가북스의 한국어판은 같은 시구를 다소 실망스럽게 번역하고 있다: “그들은 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노예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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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e

You

우리는 누군가가 되고 싶어할 수 있지만 그에게 성적 욕망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고, 동시에 누군가를 성적으로 욕망하면서 그 사람이 되고 싶어할 수도 있다. 이런 역학이 변화하고 뒤바뀔 때 우리는 놀라게 되기도 한다. 한 분석대상자가 최근 말하길, 자신과 파트너가 “같은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 성적 욕망이 갑자기 사라졌다고 했다.

Darian Leader (McShrunk),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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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첨밀밀

1995년 5월 8일 등려군이 세상을 떠났다. 이 뉴스를 듣고 뉴욕의 거리를 걷던 장만옥이 어느 쇼윈도 텔레비전 앞에 멈춰 등려군의 생전 모습을 지켜본다. 여명은 마침 그곳을 지나치지만, 등려군의 이미지가 그를 당긴다. 낮에는 등소평을, 밤에는 등려군을 듣던 본토의 동지들은 제각기 달콤쌉싸름한 욕망의 환상통을 겪다가 자본주의 세상의 중심에서 비로소 마주 본다.

첨밀밀의 한 장면

영어 제목이 모든 것을 담고 있다. <Comrades, Almost a Love Story> 진가신 감독에 의하면 이것은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은 연인이 아니라 낯선 세계에 밀려온 외로운 이웃이다. 그들은 홍콩에 도착할 때 등을 맞대고 온다. 서로 알지 못하면서도 이미 서로를 의지했다. 영화 속 모든 인물은 상대를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 대상의 이미지를 소유하고 각자의 방식으로 헌신한다. 사랑에 대해 말할 필요 없다. 그들의 마음은 달빛이 대신 말해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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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log

걷는 자

우리 동네에는 방황하는 노인이 있다. ‘방황하는 유대인’에서 따와 내 멋대로 붙인 별명이다. 새까맣게 그은 얼굴 때문에 더 선명하게 보이는 짧고 단정한 백발이 깃발처럼 눈길을 끈다. 깔끔하게 면도한 얼굴과 검소하지만 청결해 보이는 옷차림을 보면 분명 자기 관리를 하는 분이다. 그는 일 년 내내 하얀 고무신을 신고 도무지 읽어낼 수 없는 표정을 한 채 하루 종일 이곳저곳을 걷는다. 이곳에 이사 오고 나서 거의 매일 마주치게 되자 어느 날은 나도 모르게 목인사를 하고 말았는데, 뜻밖에도 큼직한 미소를 만들어 보이며 답례하셨다. 내가 어설프게 대화를 건네려고 하자, 예의 그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금세 돌아가서 방금 있었던 만남의 순간을 털어내듯 가던 길을 서둘렀다. 그렇게 몇 번 더 인사를 주고받은 다음에서야 비로소 그분이 지적장애가 있는 분이라는 걸 눈치챘다. 

이웃 할머니에게 넌지시 여쭤보았더니 ‘걸음병’이라고 했다. 노인은 걷지 않으면 안 되는 병을 안고 태어났기에 평생 근방의 산과 들을 밤낮 가리지 않고 걸어 다녔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을 걷는 것도 봤다고 하셨다. 그렇게 하루 종일 걷는 자식을 애지중지 뒷바라지하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동생네 부부가 대신 돌봐주고 있기를 수십 년째라는 것이다. 할머니는 동생의 부인이 대단하다고 극찬했다. 혹 덩이 같은 시아주버니에게 매일 아침 깔끔한 옷을 내어주고 따스운 밥을 지어 먹이고 면도와 이발에 신경 쓰기를 지극정성으로 해냈다는 것이다. 그 제수씨라는 분의 고단했을 삶을 이리저리 상상해 보았다. 노인이 나이에 비해 건강해 보이는 데에는 매일 걷는 것도 도움이 되었겠지만, 뒤에서 묵묵히 돌봐주는 가족의 희생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저 멀리 정처 없이 걷는 노인의 흰머리는 일상의 풍경이었기에 어느 순간부터는 무심히 날아가는 까마귀나 길가에 핀 꽃다지처럼 배경으로만 존재하게 되었다가 그마저도 점차 흐려졌다. 

수년이 지났다. 그러니까 17년을 함께 한 우리 고양이를 떠나보낸 아픔으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던 때, 문득 살아남은 자의 저주받을 허기가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하자, 내가 그 노인을 못 본 지 꽤 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마을 풍경의 일부였던 존재의 부재에 대한 자각이 한없이 나를 불안하게 했다. 왠지, 그간 별 관심도 없던 그 노인이 무사하기를 격하게 빌었다.

다음 날 동네를 몇 바퀴 돌다가 텃밭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일을 하고 있던 이웃 할머니를 만났다. ‘걸음병’ 노인의 근황을 물었다. 코로나바이러스와 싸우면서 폐에 손상을 입고 십 년은 더 늙어버린 그 할머니는 흐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가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끝내 납득하지 못하셨다. 전설 속 방황하는 유대인처럼, 예수가 재림할 때까지, 시공간이 직조한 미로 안을 맹렬하게 떠돌 것같던 흰머리 노인의 뒤를 캐는 짓은 왠지 더 이상 계속할 수 없었다.

그 후로도 또 다른 몇 년이 지난 지금 나는 흰머리 노인에게 닥친 일을 알고 있다. 오래도록 병을 앓던 노인의 동생이 다른 모든 필멸자들처럼 질기고 무기력하던 삶에 마침표를 찍었다. 남편을 간병하면서 시아주버니까지 돌보던 강인한 할머니는 비로소 자유를 선택했다. 멀리서 사는 자녀들과 상의 끝에 그들의 큰아버지를 중증장애인을 돌보는 요양원에 보낸 것이다. 흰머리 노인은 그렇게 더 작은 미로에 갇혔다. 그의 옷은 제수씨가 아니라 시설과 계약맺은 전문업체가 세탁할 것이다. 이것이 동네 사람들에게 유포되고 있는 결말이다.

나는 다른 결말도 알고 있다. 걸음병 노인은 동생이 세상을 떠나자 갑자기 제정신을 찾았다. 삶의 저주에서 해방된 동생을 부러워한다. 평생 자기를 돌보면서 자기보다 더 늙어버린 제수씨를 보고는 가슴이 미어진다. 그에게 언도된 형벌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고 누구도 저지할 수 없다. 끝을 헤아려 보지만 무한을 감각할 수 없음에 현기증을 느낀다. 그에게 내려진 저주는 부수적 피해를 낳았다. 저주가 동생 가족에게 넘쳐흘렀다. 노인은 온전해진 정신이 다시 자신을 배신하기 전에, 잘 웃는 걸음병 환자가 아니라 폭력적이고 격리가 필요한 위험한 광인을 연기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렇게 그는 다른 누군가에게 때늦은 자유를 선사할 더 좁고 무해한 미로를 선택한다. 그는 이제 매일 알록달록한 알약을 삼키고 콘크리트로 된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복도를 하염없이 걷다가 마주오는 사람을 만나면 예의 그 큼직한 미소를 지어 보일 것이다. 그곳에서 그는 꿈속에서도 정처 없이 걷는다. 이것이 나만 아는 두 번째 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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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한스 그룬디히

Victims of Fascism, 1946/49
〈파시즘의 희생자들〉, 1946.
레아와 한스 그룬디히, 1928
레아와 한스 그룬디히, 1928

한스 그룬디히의 초현실적이고 화려하면서도 불길한 색조가 가득한 그림을 보고 그의 생애를 찾아봤다. 드레스덴의 프롤레타리아, 철저한 공산주의자였고 나치에 저항하다 투옥되었으며 동독에서 마지막 영예를 누리다가 생을 마감했다. 독일 공산당 동지였던 아내 레아와 찍은 사진도 범상치 않다. 그의 이름은 구글 아트 & 컬처에서 검색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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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itics

이웃

2025년 2월 15일 모르데카이 브래프먼(27세)이라는 유대인이 마이애미 비치에서 트럭을 몰고 가다가 유턴해서 방금 지나온 차량을 향해 총격을 가했다. 피격 차량에는 브래프먼과 일면식도 없던 아버지와 아들, 야론 라베이와 아리 라베이가 타고 있었다. 그들은 플로리다에서 휴가를 보내던 이스라엘인들이었다. 아들은 어깨에, 아버지는 왼쪽 팔에 총상을 입었다. 브래프먼은 두 명의 팔레스타인인을 발견했고 그들을 총으로 쏴 죽였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어깨에 총을 맞은 아리 라베이는 가해자가 팔레스타인인이라고 생각했고 페이스북에 “아랍인에게 죽음을”이라는 글을 올렸다. 팔을 다친 아버지는 사고 당시 머리에 야물커를 쓰고 있었다.

우리가 너무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의 불가해한 타자성을 인식하게 만드는 존재가 프로이트적 의미에서 이웃이 아니던가. 서로를 팔레스타인인으로, 서로를 빨갱이로 오인한다. 외부의 적은 필연적으로 내부의 적으로 전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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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itics

으뜸패

트럼프는 2005년, <액세스 할리우드>라는 티비 프로그램의 한 에피소드를 촬영하기 위해 이동하면서 프로그램 진행자였던 빌리 부시에게 여러 여성을 겨냥한 음담패설을 늘어놓았고, 2016년 테이프가 공개된다. 유명 배우이자 모델인 아리안 주커에 대해서도 (트럼프 자신처럼) 유명인이 되면 무슨 짓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말했다.

I better use some Tic Tacs just in case I start kissing her. You know I’m automatically attracted to beautiful—I just start kissing them. It’s like a magnet. Just kiss. I don’t even wait. And when you’re a star, they let you do it. You can do anything. Grab ’em by the pussy. You can do anything.

지난 2월 28일, 트럼프의 반복되는 카드 은유, 당신이 쥐고 있는 패가 없다는 말에 젤렌스키가 “나는 카드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정당하게) 반박하는 영상은 이를 지켜보던 으뜸패(trump)를 쥐고 있지 않은 모든 나라의 인민들에게 오랫동안 잊기 힘들 만한 외상적 경험을 선사했다. 무섭다가 우스꽝스러우면서 소름 끼치는 경험. 식사 시간에는 말하지 말라는 잔소리를 식사 시간 내내 하는 카프카의 아버지, 법을 말하면서 법 위에 군림하는 자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다. 그들은 손에 으뜸패를 쥐고 있고 손바닥에 王자를 새겨넣었다. 게임을 거부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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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C

포커 페이스

지난해 이 드라마를 보면서 20세기에 인기를 구가했던 티비쇼 몇 가지를 포스트모던하게 짜깁기해 놓은 느낌이 들었고, 거기서 오는 아련한 향수 같은 게 있었다. 시즌 2 티저가 반갑다. 케이티 홈즈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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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ETC

외재하는 강박

복도훈은 ⟪유머의 비평⟫에서 서효인의 시집 ⟪여수⟫에 수록된 몇 편의 시에 가해진 자기검열1이윤주, “내 문학 작품 속 여혐 수정” 새 풍경, 한국일보, 2017.02.23.이 크게 신경 쓰이지는 않았지만, 시집을 읽고 나서는 수정 이전과 이후의 표현을 비교해 볼 수밖에 없었다고 밝힌다.

그러나 시인의 말을 빌리면 “온갖 곳에 염결성과 예민함을 드러내면서 하필 방종했던” 방식으로 자신의 시에 드러나게 된 여성 혐오적인 표현을 삭제하거나 수정한 부분이 막상 내가 『여수』를 읽을 때는 크게 신경이 쓰이지는 않았다.2복도훈, ⟪유머의 비평⟫, 도서출판b, 40.

시인이 언론에 밝힌 바에 의하면, 시 〈서귀포〉에서 ‘궁둥이’를 ‘몸 어딘가’로 바꾸었고, 또 다른 시에서는 ‘여공’을 ‘젊은이’로, ‘아줌마’를 ‘학부모’로 바꾸었다.3이윤주의 같은 기사, “최근 세 번째 시집 ‘여수’를 출간한 서효인 시인은 작품에서 ‘여성혐오’가 엿보이는 시어를 고치거나 다시 썼다. 시 ‘구미’에서 ‘공장에 다니는 여공들’을 ‘공장에 다니는 젊은이들’로, 시 ‘마산’에서 ‘우리가 모두 아줌마가 되면’을 ‘우리가 모두 학부모가 되면’으로 바꾸는 식이다. 시 ‘서귀포’에서 제주 4ㆍ3항쟁을 회상하는 표현은 발표 당시 ‘젊은 남자는 섬 말 쓰는 아녀자를 잡아서 궁둥이 사이에 대검을 꽂아 넣었다’로 썼지만, 이번 시집을 묶으며 ‘미아들은 섬 말 쓰는 사람들을 잡아다 몸 어딘가에 대검을 꽂아 넣었다’로 바꿨다.” 의미는 알겠는데, 과연 시인이 수정한 표현이 이전의 작품보다 현재의 작품을 더 낫게 만들었을까?

자극적인 표현을 덜 자극적인 표현으로 바꾼다고 폭력이 줄어들 것으로 믿는 것은 ‘민간인 살상’을 ‘부수적 피해’로 바꿔 부른다고 민간인 살상이 줄어든다고 간주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정치적 올바름’의 언어검열이나 완곡어법은 언어의 해방이 아니라 언어의 감옥이 될 공산이 농후하다. 그것은 정신분석적 의미에서 무의식적인 억압-검열보다는 상처와 폭력에 대한 체계적인 ‘부인verneinung’에 가깝다. 그것은 단지 덜 자극적이고 덜 불쾌한 표현의 규칙과 예시를 만들고 그 규칙에 자신의 이름을 서명해 넣는 일을 선호할 뿐이다.4복도훈의 같은 책, 43.

히스테리 환자는 거짓말의 형태로 진실을 말한다. 그가 말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사실이 아니지만, 거짓말은 거짓된 형태로 진정한 불만을 표현한다. 반면 강박증 환자의 진술은 문자 그대로 사실이지만, 그 진실은 거짓말을 위한 진실이다. 슬라보예 지젝은 종종 히스테리를 포퓰리즘에, 강박증을 정치적 올바름에 빗댄다. 포퓰리즘은 거짓말의 형태로 진실을 말한다.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거나 해결이 불가능한 방식으로 문제를 다루면서도, 그 거짓이 실제로 존재하는 분노와 불만을 건드린다. 반면 정치적 올바름은 진실로 거짓말을 한다. 차별과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 언어를 바꾸고 상징적 질서에 규칙을 추가하지만, 정작 사회경제적인 수준에서 근본적인 차별, 불평등은 해결되지 않는다. 지젝은 정치적 올바름을 대리수동성으로 묘사한다.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나거나 실질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행동한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바꿔 나가자. 그래야 전체적으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수 있다!”5슬라보예 지젝, “Repeating Lenin“, lacan.com 복도훈도 유사한 의미의 다른 문장을 인용하고 있다. “그것은 문제를 살아있게 하기 위해서 자꾸만 새로운 답을 내놓는다.”6슬라보예 지젝,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411.

이런 강박은 정치적인 지형 안에서 고압적으로 표출된다. 지젝은 자유주의 엘리트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정치적 무지와 혼란, 맹목을 꾸짖고 모욕하는 것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그들을 고압적으로(patronizingly) ‘이해’한다고 비판했다.7슬라보예 지젝, 앞의 글. 강준만은 “나는 기본적으로 PC 운동의 취지와 당위성엔 동의와 지지를 보내면서도 동의와 지지를 보낼 뜻이 있는 사람들까지 등을 돌리게 만드는 운동방식의 문제엔 비판적인 입장”이라고 밝힌바 있다. “PC운동이 애초에 인간에 대한 예의에서 출발한 것임에도 어떤 사람들이 그 예의를 지키지 않거나 소홀히 대한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너무 거친 비판을 퍼부음으로써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는 건 모순”이라고 했다.8강준만, ⟪정치적 올바름⟫, 인물과사상사, 30.

작가와 작품의 분리라는 주제에서도 유사한 강박을 본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수십 년 동안 노벨문학상 후보 명단에 올랐으나 끝내 수상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9노벨문학상은 종종 납득하기 힘든 이상한 선택들을 하는데, 정치인인 윈스턴 처칠, 포크싱어인 밥 딜런에게 상을 준 일도 그렇지만, 20세기 초부터 내내 이어져 온 어떤 정치적 강박이 작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종종 받게된다. 그가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에게 훈장을 받았기 때문에 노벨문학상에서 멀어졌다고 보는 의견이 많은 것 같다. 그를 심지어 반공주의자라고도 얘기하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정치에 소극적인 보수주의자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그는 유전적으로 시력이 좋지 않았다. 아버지와 할머니도 일찍이 시력을 잃었고, 본인도 국립도서관장에 취임한 5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눈이 멀기 시작했다. 이후 30년 이상을 어둠 속에서 살았다. 그는 그가 자주 묘사한 이미지처럼 중심이 없는 미로 속을 더듬으며 “부유하듯” 살았으며, 누군가 대신 읽어줘야 하는 책으로 가득한 도서관이 그의 세계였다. 세상은 수수께끼였고 그는 그 점을 경이롭고 다행스럽게 여겼다. 그에게 정치적이기를 요구할 수 있을까? 아무리 그래도 피노체트에게 훈장을 받다니 심하긴 했다. 하지만 그러한 결함을 그의 실존적 맥락이나 그가 평생 추구해 온 문학적 맥락을 무시한 채, 그저 그의 윤리적인 결함으로 단정할 수 있는 걸까?

마침 프랑스의 사회학자 지젤 사피로가 쓴 흥미로운 제목의 책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를 소개하는 한겨레 기사가 맥빠지지만 불가피해 보이는 결론을 요약하고 있다.

그렇다면, 작가와 작품은 분리할 수 있는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자칫 허탈하게 들릴 수도 있는 결론이지만, 이 질문에 대해서는 결코 단순하고 결정론적인 답변이 가능하지 않으며, 사안에 따라 꼼꼼하고 합리적인 논의가 필요하다는 취지로 받아들여진다.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재적 분석과 외재적 분석이 모두 필요하고, 문제가 있는 작품이라 하더라도 검열이나 ‘삭제’보다는 경고 문구를 활용하는 게 바람직하다. 출판사 팬 맥밀란이 마거릿 미첼의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2023년에 재발간하면서 이 책이 ‘인종 차별적’이고 ‘유해하다’고 밝힌 것이 참조할 만한 사례다.

footnote
  • 1
    이윤주, “내 문학 작품 속 여혐 수정” 새 풍경, 한국일보, 2017.02.23.
  • 2
    복도훈, ⟪유머의 비평⟫, 도서출판b, 40.
  • 3
    이윤주의 같은 기사, “최근 세 번째 시집 ‘여수’를 출간한 서효인 시인은 작품에서 ‘여성혐오’가 엿보이는 시어를 고치거나 다시 썼다. 시 ‘구미’에서 ‘공장에 다니는 여공들’을 ‘공장에 다니는 젊은이들’로, 시 ‘마산’에서 ‘우리가 모두 아줌마가 되면’을 ‘우리가 모두 학부모가 되면’으로 바꾸는 식이다. 시 ‘서귀포’에서 제주 4ㆍ3항쟁을 회상하는 표현은 발표 당시 ‘젊은 남자는 섬 말 쓰는 아녀자를 잡아서 궁둥이 사이에 대검을 꽂아 넣었다’로 썼지만, 이번 시집을 묶으며 ‘미아들은 섬 말 쓰는 사람들을 잡아다 몸 어딘가에 대검을 꽂아 넣었다’로 바꿨다.”
  • 4
    복도훈의 같은 책, 43.
  • 5
    슬라보예 지젝, “Repeating Lenin“, lacan.com
  • 6
    슬라보예 지젝,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411.
  • 7
    슬라보예 지젝, 앞의 글.
  • 8
    강준만, ⟪정치적 올바름⟫, 인물과사상사, 30.
  • 9
    노벨문학상은 종종 납득하기 힘든 이상한 선택들을 하는데, 정치인인 윈스턴 처칠, 포크싱어인 밥 딜런에게 상을 준 일도 그렇지만, 20세기 초부터 내내 이어져 온 어떤 정치적 강박이 작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종종 받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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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주체의 분리

블랑쇼에 관한 글을 읽다가, 데리다가 블랑쇼의 짧은 단편 《내 죽음의 순간 L’instant de ma mort》에서 일어나는 주체의 분리에 관해 주목하고 그에 관한 강연을 했음을 알게 되었다. 블랑쇼의 단편은, 1994년 노년의 블랑쇼가 50년 전의 자신(어떤 ‘젊은이’)이 1944년 까엥(Quain)에서 경험한 죽음의 순간을 회상하는 내용이다. 국내에는 아직 출판된 바 없는 듯하여, 영문판을 찾아보고 한국어로 옮겨 봤다.


나는 한 젊은 남자를 기억한다 — 아직 젊음을 간직한 한 남자. 죽음 자체에 의해, 그리고 어쩌면 불의(不義)의 오류로 인해 죽음을 면한 남자였다.

연합군은 마침내 프랑스 땅에 발을 디뎠다. 이미 패배한 독일군은 무의미한 잔혹함으로 허망한 저항을 이어가고 있었다.

한 대저택 — 사람들은 그것을 ‘성(城)’이라 불렀다 — 그 문이 조심스럽게 두드려졌다. 나는 그 젊은 남자가 문을 열어, 도움을 요청하러 온 낯선 방문객들을 맞이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날카로운 외침이 터져 나왔다. “모두 밖으로 나와!”

한 나치 장교가, 너무나도 유창한 프랑스어로 명령했다. 그는 가장 연로한 이들을 먼저 내보내고, 이어서 두 명의 젊은 여인에게도 같은 명령을 내렸다. “나와! 나와!” 이번엔 그의 목소리가 더욱 사나워졌다. 그러나 젊은 남자는 도망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마치 사제가 제단으로 나아가듯 묵직한 걸음으로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장교는 그를 거칠게 흔들어 깨우며, 땅에 흩어진 탄피와 총알을 가리켰다. 분명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것이다. 이곳은 더 이상 평온한 터전이 아니라, 전장의 한복판이었다.

그 순간, 장교는 알 수 없는 언어로 목이 멜 듯 말을 더듬었다. 그리고 이미 한층 늙어 보이는 남자의 코앞에 탄피와 총알, 수류탄을 들이밀며 또렷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것이 네가 만들어낸 결과다.”
나치 장교는 부하들을 정렬시켰다. 그들은 규율에 따라 인간이라는 표적을 향해 조준했다. 그 순간, 젊은 남자는 담담하게 말했다. “적어도 제 가족만이라도 안으로 들여보내 주세요.” 그렇게 해서 아주 느리고도 긴 침묵의 행렬이 형성되었다. 먼저 아흔네 살의 고모, 그리고 비교적 젊은 그의 어머니, 이어서 그의 누이와 제수까지. 마치 모든 것이 이미 끝난 듯한 고요 속에서, 그들은 조용히 실내로 돌아갔다.

나는 알고 있다 — 나는 정말로 알고 있다 — 이미 독일군의 총구가 그를 겨냥하고, 최후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던 그 순간, 그가 갑자기 놀라운 가벼움을 느꼈다는 것을. 그것은 일종의 황홀경이었을까? 그러나 결코 행복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절대적인 환희? 아니면, 죽음과 죽음의 만남 그 자체였을까?

내가 그의 입장이었다면, 굳이 분석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아마도 그 순간 갑자기 무적이 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죽었으나 — 불멸한 존재. 어쩌면 그것은 황홀경이었을까. 그러나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고통받는 인류에 대한 연민, 그리고 영원하지 않음에서 오는 기쁨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죽음과 은밀한 우정을 맺었다.
바로 그 순간 — 현실로의 갑작스러운 귀환. 가까운 곳에서 치열한 전투의 굉음이 폭발했다. 저항군 마키(Maquis)의 동지들이 그가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알고 구출 작전을 벌이고 있었다. 중위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자리를 떴다. 그러나 독일군 병사들은 여전히 정렬된 상태로 멈춰 서 있었다. 그들은 마치 시간이 정지한 듯한 침묵 속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 병사들 중 한 명이 다가왔다. 그리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독일인이 아니다. 러시아인이다.” 그리고 묘한 웃음을 띠며 덧붙였다. “블라소프 군대다.” 그 병사는 손짓으로 그에게 사라지라고 했다.

나는 그가 여전히 가벼움의 감각 속에서 멀어져 갔다고 믿는다. 그는 결국 먼 숲, ‘히스 숲(Bois des Bruyères)’에 도착했다. 거기서 그는 자신이 익히 아는 나무들 사이에 몸을 숨겼다. 그렇게 빽빽한 숲 속에서 한참이 지난 후, 문득 현실 감각이 돌아왔다. 사방이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농가들은 불타고 있었다. 불길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모든 것이 타오르고 있었다. 조금 후 그는 알게 되었다. 세 명의 젊은이들이 — 농부의 아들들로, 전투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던 이들이 — 오직 젊다는 이유만으로 처형당했다는 사실을.

길 위에도, 들판에도 부풀어 오른 말들의 시신이 널려 있었다. 그것들은 이 전쟁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는지를 침묵 속에서 증언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상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던 것일까? 나치 중위가 돌아왔을 때, 그는 젊은 성주의 실종을 깨달았다. 그런데도 어찌 된 일인지, 분노와 격노가 성을 불태우는 쪽으로 향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성(城)’이었기 때문이다. 성의 정면에는 한 해가 새겨져 있었다. 1807. 그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을까? 그 해는 예나(Jena) 전투가 벌어진 해였다. 나폴레옹이 작은 회색 말을 타고 창밖을 지나갈 때, 헤겔(Hegel)은 그를 바라보며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나는 세계정신을 목격했다.” 그러나 거짓과 진실이 뒤섞인 역사. 헤겔은 또 다른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프랑스 군대가 자신의 집을 약탈하고 유린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헤겔은 ‘경험적 사실’과 ‘본질’을 구분할 줄 알았다. 그리고 1944년, 나치 중위는 농가들이 받을 수 없었던 ‘존중’ 혹은 ‘고려’를 이 성 앞에서 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은 철저히 수색을 했다. 그들은 금품을 약탈했다. 별채에 있는 ‘고층 방(la chambre haute)’에서 몇 가지 문서와 두꺼운 필사본을 발견했다. 그것에는 어쩌면 전쟁 계획이 담겨 있었을지도 모른다. 마침내, 그들은 떠났다. 모든 것이 불타고 있었다. 그러나 성만은 남아 있었다. 귀족들은 살아남았다.

그 순간부터, 젊은 남자는 아마도 불공평함의 고통을 겪기 시작했을 것이다. 더 이상 황홀은 없었다.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살아남은 이유는 단 하나 — 심지어 러시아인들의 눈에도 그는 귀족 계층에 속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었다.

이것이 전쟁이었다. 누군가는 살아남고, 누군가는 학살의 잔혹함 속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총성이 아직 울리지 않았던 바로 그 순간까지도, 그가 느꼈던 가벼움의 감각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나는 그것을 정확히 번역할 수 없다. 삶에서 해방된 감각일까? 무한이 열리는 순간일까? 그것은 기쁨도, 고통도 아니었다. 두려움이 사라진 상태도 아니었다. 어쩌면 이미 죽음의 문턱을 넘어선 한 걸음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안다. 아니, 나는 상상한다. 그 분석할 수 없는 감각이 그의 남은 삶을 변화시켰으리라는 것을. 마치 그 밖의 모든 죽음이, 이제 그의 내면에 있는 죽음과 맞부딪칠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처럼. “나는 살아 있다. 아니, 너는 이미 죽었다.(Je suis vivant. Non, tu es mort.)”


훗날, 그는 파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말로(Malraux)를 만났다. 말로는 그에게 자신이 포로가 되었지만, 신분이 발각되지 않은 덕분에 탈출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한 원고를 잃어버렸다. “그건 예술에 대한 단상들에 불과했어. 얼마든지 다시 쓸 수 있지. 하지만 잃어버린 원고는 절대 다시 같은 것이 될 수 없어.” 폴랑(Paulhan)과 함께 원고를 찾아보려 했지만, 그것은 결국 허사였다.

그러나 무엇이 중요한가. 이제 오직 가벼움의 감각만이 남아 있다. 그것은 곧 죽음 그 자체이거나,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제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나의 죽음이라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