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스스로의 감정에 익사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쳤고, 별 한 점 없는 캄캄한 격정의 늪을 헤매면서도 구차한 자기연민을 경계했다. 정치적으로, 윤리적으로 후회할 만한 결정을 내리고 싶지 않았다. 끊임없이 자신을 다그쳤다. 가장 진실되면서도 후회 없이 행동하라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사랑을 버려야 한다고. 더 큰 가치를 좇아야 한다고. 하지만 우편물 통보를 받고 진심으로 두려웠다. 그토록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시나리오를 확인해주는 무뚝뚝한 마침표일까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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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옆으로는 작은 개울이 흐른다. 집의 경계는 마른 돌무더기뿐이라 그저 잡초만 무성하던 곳이었다. 재작년 가을 무렵, 그 거친 돌무더기 속에서 두 그루의 나무가 크게 자라나 있음을 눈치챘다.
작은 쪽은 가시 없는 잼피나무였고, 그보다 큰 쪽은 팽나무였다. 어느 고마운 새가 먼 길을 날아와 씨앗을 선물하고 간 모양이네, 하며 정성껏 가지를 치고 모양을 매만져 주었다. 팽나무 열매는 새들이 유독 좋아한다고 했다. 자라는 속도도 실로 경이로웠다. 작년 여름, 집 경계에 짙고 시원한 그늘이 생겼다. 올해는 더 큰 그늘이 생길 것이다.
팽목항(彭木港)도 팽나무가 많아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설이 있다. 세월호 12주기, 오토바이로 4시간을 달렸다. 진도에 들어서자 아직 덜 떨어지고 남은 화사한 벚꽃, 이제 피어나기 시작한 철쭉들이 반겼다. 팽목항까지 가는 동안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겸손한 팽나무들도 여럿 지나쳤을 것이다. 눈썰미 나쁜 인간이 미처 식별하지 못했을 뿐.
바닷바람이 여전히 사나웠다. 바람 잘 날 없는 그 쓸쓸한 항구, 분향소는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며 세상에 무거운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그토록 외롭고 아픈 곳 이름이 팽목이라니… 새들이 사랑하여 여기저기 씨앗을 퍼뜨리고, 지친 이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내어주는 팽나무라니.


봄비가 내리는 날, 개울가를 걷다가 떨어진 하늘타리를 보았다. 괜히 주우려다 발이 진창에 빠졌다. 되돌아간 길은 아니 걷던 길이 되는가. 썼던 글을 지우면, 했던 말을 잊으면, 없던 일이 되는가. 빈자리가, 부재가 존재보다 오래 남는 메시지였던 니콜라이 예조프를 떠올리며 씁쓸히 웃었다. 검열된 기억의 빈자리마다 싸늘한 증오가 고여 있어 슬프다. 이토록 그리운데 그토록 미울 수가 있다니… 그래, 미움은 아니겠지. 젖은 발이야 어찌어찌 되겠지. 첨벅첨벅 물을 튀기며 걸어왔다.
선배와 통화를 하다가 깨달음을 얻었다. 내가 이해하기 힘들었던 모든 것이 전제 하나를 바꿔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된다. 그러니 인생의 선배인 게지. 나는 아직 멀었다, 멀었어. 그렇게 펑펑 울고 나니 그동안 미칠 것만 같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편해졌다.
귀가하여 방안을 둘러보니 정성 가득한 흔적들이 곳곳에서 보인다. 그게 내 생각과는 다른 의미들이었던 거야. 하지만 다른 의미로 그러는 게 가능하다고? 세상 모두가 너 같지 않아. 그럼 모든 게 설명된다. 아니, 하지만 전에 나눴던 이런저런 대화들을 보면 설명이 안 되는데? 지난 대화 따위 복기하지 마. 아무런 의미 없어. 그래 상대방의 마음을 착각하긴 했어도, 나는 나대로 사랑할 수 있는 거지. 거기서 삐끗하면 사랑이 증오로 변하는 법.
나는 진심으로 그분의 행복을 빌 수 있다. 고양이가 없지만 다행히 이번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아.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고 머리가 터질 것 같아 마당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일을 했다.
며칠 전 135x38mm 방부목을 사와 1200mm 길이로 여섯 개를 재단했다. 목재를 가공할 때 나는 나무 냄새가 너무 좋다. 목수가 직업이었다면 더 행복할까? 모서리를 샌딩한 후 투명 바니시를 칠하고 말렸다. 바니시가 잘 마르면, 다시 바니시를 칠한다. 총 네 번 반복한다.
그렇게 준비한 목재로 오늘은 정원 테이블의 상판을 교체했다. 썩어버린 옛 시간을 뜯어낸다. 새 목재를 올리면서 타이머가 리셋되는 거다. 준비해 둔 목재를 올리면 끝이었는데, 고정할 때 필요한 목재용 나사못이 모자랐다. 급히 오토바이를 타고 나가서 사 왔다. 감기 때문에 아직도 콧물을 흘리는 상황에서 찬 바람까지 맞으니, 눈물도 흘렀다. 왕복 20km를 달렸다. 돌아와 헬멧을 벗었더니 얼굴에 눈물과 콧물 자국이 뻣뻣하게 느껴진다.
한국인들이 미얀마식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해서 ‘쪼쪼’라고 불리던 인물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한국의 추위가 견디기 힘들었지만 시종일관 푸대접을 받던 17세의 소년, 골짜기를 타고 칼바람이 불어대서 얼굴에 눈물 자국이 그대로 얼었던 소년. 심지어 나조차도 그의 이름을 외우지 못한다. 너는 참 실망스러운 놈이로구나. 그동안 참았던 온갖 복잡한 감정이 복받쳐서 마당 한가운데서 오열했다. 양지바른 곳에 앉아 있던 고양이, 봄이와 앙금이가 놀랐는지 잔뜩 긴장했다. 십수 년 전, 토미와 어굴이가 내 삶을 지탱하는 힘이었다면, 이제는 너희가 그 자리를 채워줄 거니? 곁을 내어주지도 않는 매정한 녀석들이 그럴 리가.
상판을 완성하고 나서 커피를 한잔했다. 테이블 옆에는 장작을 태울 화로가 있고, 산수유나무와 포도나무가 있다. 집안의 모든 사물, 모든 생명에는 추억이, 기억이 깃들어 있다. 저주이자 축복이다. 아침 기온이 영하 4도였지만 어쨌거나 산수유꽃이 노랗게 피었다. 포도나무에는 싹이 돋고 있다. 식물도 이토록 치열하게 제 몫의 삶을 살고있다. 오후의 따뜻한 햇볕을 머금은 시골의 마당은 이제 영상 8도. 오른손을 가만히 펴서 인사하듯 들어봤다. 산수유나무야, 안녕! 나도 배운 건데, 이렇게 손을 인사하듯 펴 들면 습기나 바람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단다. 안녕?

“제 힘듦은 제 몫”이라는 말, 두고두고 비수처럼 심장을 찌른다. 고통도 나눌 수 있다면… 따뜻한 봄날이 오기를, 부디 모든 상처가 치유되기를… 기다리자, 기다려야 한다.
내가 앓는 소리를 낼 때면 고양이들은 내 가슴팍 위로 뛰어올라 까슬한 혀로 얼굴을 훑곤 했다. 네가 아픈 건 알겠다만, 그래도 밥은 차려주고 다시 앓으려무나. 무심한 명령을 나는 기꺼이 알아들었다.
몸이 좋지 않을 때는 꿈의 길목에서 고양이들을 만난다. 꿈속의 나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면서도 아이들에게 밥과 물을 챙겨준다. 가끔 다른 고양이들, 이를테면, 우리 집 마당 어딘가에서 태어났다가 훌쩍 떠나버린 고양이들, 마당에서 뛰어놀다가 어느 날 갑자기 싸늘하게 식은 채 발견된 아기 고양이들도 모여 있다. 세상에, 너희들 여기서 살고 있었구나? 정말 다행이다, 너무 다행이야. 내가 밥을 챙겨줄게. 아프지 말고 늘 행복하게 지내렴. 이렇게 중얼거리다가 깬다. 익숙한 외로움이 반긴다.
얼마나 화나고 아프고 외로우실까. 제발, 부디, 건강과 평안을 찾으시길.
요양원에서 걸려 온 전화 한 통. 수화기 너머 요양보호사 선생님은 오늘따라 아버지가 방긋방긋 웃으신다며, 직접 숟가락을 들고 식사를 하시는 모습이 너무 고와 소식을 전한다고 했다.
몇 해 전 일이 떠오른다. 아버지가 아직 떠듬떠듬 말할 수 있을 때, 할 말이 있다며 전화하셨다. 무슨 일일까 덜컥 걱정하며 찾아갔더니 갑자기 펑펑 울면서 내게 사과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과거 나에게 몇 차례 손찌검했던 일이 떠올랐던 것 같았다. 당연하게도 자식을 사랑했겠지만 그 사랑을 건네는 법을 몰라 서툴렀던 세월. 삶이 잔뜩 엉클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고집스럽고 강인했던 아버지가 그렇게 약해져 있는 걸 보니 나도 슬펐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손을 잡아드렸다. 저에게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이니까 다 잊으시라고. 좋은 기억만 떠올리시라고. 빈말이 아니라 진심을 담았다. 잘못한 걸로 따지면 내가 더 많이 했다. 내가 저지른 수많은 잘못을 뻔뻔스럽게 잊었듯이, 아버지도 그렇게 잊을 자격이 있다.
방긋방긋 웃었다는 표현이 고마웠다.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미흡했던 것은 다정함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그저 정당하게 자신과 자식을 사랑했지만 삶이란 늘 뭔가 부족하기 마련이다. 그런 결핍은 부모가 아니라, 친구도, 선생도, 연인도, 신도, 세상 누구도 채울 수 없는 것이다. 타인의 결핍에서 자신의 과오를 찾는 일은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었다.
여태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전화를 끊고 나서는 아기처럼 방긋방긋 웃는 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 술을 마시면서 살다가 뇌졸중으로 끝내는 삶을 동정할 필요 없다고 여겼지만, 내 삶이라고 뭐가 다르겠냐. 지금껏 아버지에 대해서 어느 정도 무신경하고 냉정한 태도를 보여왔던 게 문득 후회스럽다. 지금 스스로가 죽도록 혐오스럽고, 하늘이 갑자기 무너져 눈앞이 캄캄하고, 무엇이라도 붙들고 미친듯이 매달리고 싶은 복잡한 심경이라서가 아니라, 기저귀를 차고 방긋방긋 웃는 아기 같은 존재를, 눈물을 펑펑 쏟으며 떠듬떠듬 미안하다고 사과하던 존재를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나.
슬라보예 지젝은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고, 나는 거기서 회한이나 자기혐오에 고립되는 태도를 훌쩍 넘어서는 완전히 새로우면서도 평범한 경지를 느꼈다.
우리 부모님은 엄격하진 않으셨지만, 저를 깔보는 듯한 태도를 보이곤 하셨어요. 전 부모님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두 분은 어느 날 밤 병원에서 돌아가셨는데, 다음 날 아침 전화를 통해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이미 컴퓨터 앞에 앉아 일을 하던 중이었죠. ‘다 처리가 된 건가요? 알겠습니다, 수고하세요’라고 말하고는 계속 일을 했습니다. 정말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어요. 무언가 잘못된 것 같았죠. 그렇다고 제가 그런 냉담한 반응을 보인 것에 대해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기는 건 아닙니다.
결말을 알지만 언제 막이 내릴지 모르는 연극의 구경꾼은 낡은 걱정을 깜깜한 미래의 시공간에 내던지고 한눈을 팔 수밖에 없다. 그저 아침 하늘을 바라보며 비가 오지 않기를, 하염없이 맑기를, 바람이 불지 않기를, 사랑이 그저 달콤하기를, 오늘 하루 안온하기를 바랄 뿐이다.
나중에 죽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 말 들을 때가 있었을 게지. 내일과 내일과 내일이 매일처럼 기록된 시간의 마지막 순간까지 답답한 걸음으로 기어오누나. 우리의 수많은 어제들은 바보들을 티끌 같은 죽음 길로 데리고 갔다. 꺼져라, 꺼져라. 짧은 촛불아. 인생은 그림자놀이, 한동안 무대에서 우쭐대고 안달하다 다시는 소식 없는 불쌍한 광대. 소음과 광란이 가득하고 아무런 뜻 없는 바보 이야기.1<맥베스> 5.5.17-27. 이상섭 역, 문학과 지성사, 2017, 674쪽.
footnote
- 1<맥베스> 5.5.17-27. 이상섭 역, 문학과 지성사, 2017, 674쪽.
2000년 5월의 마지막 주에 방영된 ⟪퓨처라마⟫ 에피소드는 ⟨Anthology of Interest⟩. 프라이는 그가 냉동 캡슐에 빠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해 했고, 판스워스 박사의 What-If Machine은 1999년의 시공간에 남은 프라이의 현실을 들여다 본다. 그는 여전히 피자 배달부로 살아가며, 로봇과 외계인이 뒤섞여 사는 미래 대신 90년대 말의 지루한 삶을 이어간다. 하지만, 미래의 그 자신이 존재하지 않게 되어 퓨처라마의 시공간에 균열이 생긴다.

이를 피자가게 단골이었던 스티븐 호킹 박사 — 호킹의 목소리 연기는 실제로 호킹 박사가 했다 — 가 눈치채는데, 그는 사실 우주의 시간-존재 균형을 지키는 위원회의 멤버였다. 그는 프라이 때문에 생긴 균열에 “호킹 홀”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어한다.

위원회는 프라이를 납치하여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들을 대놓고 너드라고 부른다.
앨 고어. 마찬가지로 앨 고어 본인이 직접 목소리 연기를 했다. 앨 고어는 환경보호자로서 우주의 붕괴에 반대한다는 입장이다.

니셸 니컬스. 트레키들의 우상, 우후라 역시 본인이 직접 등판한다.

던전 앤 드래곤의 창시자 개리 가이객스가 등장하여 모든 문장을 끝맺기 전에 주사위를 굴린다. 그는 프라이에게 “+1 메이스”를 무기로 건넨다.

IBM이 만들어 체스게임에서 인간을 이긴 체스 특화 인공지능 딥 블루가 인턴이라며 소개된다. 목소리 연기는 트레스 맥닐이 담당했다. 앨 고어는 그(녀)에게 모든 임무가 체스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언제가는 이해하게 될거라고 조언한다.

이 짧은 이야기는 프라이가 냉동 챔버를 파괴하여 미래의 자신을 죽여버리는 패러독스를 만들어냄으로서 현실을 붕괴시키는 결말로 이어진다. 우주는 소멸하고 너드들만 남는다. 그들은 기꺼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영원히 던전 앤 드래곤을 즐기기로 한다. 앨 고어는 열 번째 정도 수준의 부통령이 되겠다고 한다.

대략 이십여 년 만에 다시 보는 것 같다. 90년대의 너드들이란 다소 소외된 주변인이었고 조롱과 희화화의 대상이었다. 컴퓨터와 인공지능, 과학 같은 따분한 공부를 하고, 집구석에서 던전 앤 드래곤을 즐기며, 스타트렉과 같은 서브컬처에 몰입하면서, 환경 문제에 목소리를 내는 성가신 존재들이었다. 노스텔지어와 자학적인 개그로 가득한 상징들을 보고 있자니 새삼 세월을 감각하게 된다. 90년대의 그 너드들이 오늘날의 빅테크 산업을 이끌어 가고 있으며, 그들이 즐기던 코믹스와 애니메이션이 블록버스터로, 가장 잘 팔리는 문화상품으로 끊임없이 재탄생하고 있다. 그들은 핍진한 전문가이자 문화 주도층이 되었다.1오늘날 너드의 이런 ‘성공’은 기술에 대한 무비판적인 숭배, 인터넷-정보에 대한 맹신, 디지털 혁신을 자연스럽고 중립적인 힘으로 환상화하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내다.
옆집 이장네 부부에겐 세 아들이 있다. 큰아들이 중학생인데 아직도 컴퓨터를 잘 못 다루는 것 같다며 나에게 좀 가르쳐 줄 수 없겠냐고 물었다. 간단하게 답을 줬다. 컴퓨터로 게임을 할 수 있게 허용하라고, 컴퓨터로 마음껏 게임을 할 수 있다면 알아서 준전문가가 될 거라고. 그게 너드들이었다. 아무 쓸모없는 짓에 시간 낭비를 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런 “+1 메이스” 하나를 마음속에 품고 살아야 인생 아니겠나. 판스워스 박사가 이 에피소드 마지막에 자조적으로 중얼거린다. “사람은 꿈을 꿀 수 있지.”
footnote
- 1오늘날 너드의 이런 ‘성공’은 기술에 대한 무비판적인 숭배, 인터넷-정보에 대한 맹신, 디지털 혁신을 자연스럽고 중립적인 힘으로 환상화하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