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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Review

섬뜩하고 으스스한

경향신문, “설농식씨 이야기” (복길)는 김동령, 박경태 감독의 영화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를 상당히 매혹적인 방식으로 평하고 있어서 여러 번 반복해서 읽게 된다.

근원적인 불안 — 그러니까 좀더 정직하게 말하자면 동시대를 사는 어떤 여성(들)의 불안 — 을 삼킬 수 있는 섬뜩하고 으스스한 존재란 지금껏 주변에 존재해왔지만 장르적인 전통 속에서 배제되어 왔던, 글도 모르는 여자들의 머릿속에 가득하던 ‘수상하고 몽환적인’ 장면들이 오로지 화자의 기분에 따라 즉흥적이고 무질서하게 나열되고 섞이고 반복되고 변주되면서 만들어지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뒤죽박죽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는 그 이야기를 이해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들으려는 사람에게 비로소 말을 한다.

살아온 인생의 굴곡은 모두 다르지만 꾹 참은 울분이 터져 새어 나오면 그 속에 우리는 같은 모습으로 섞인다.

복길, “설농식씨 이야기”

내러티브가 문제가 아니고 그 수상하고 몽환적인 머릿속 장면들을 탄생시킨 억압의 기원들이야말로 중요한 것이며 바로 그 기원들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여자들)은 기어코 그것이 바로 자신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아채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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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Review

<라스트 듀얼>

<라스트 듀얼>에서 자크(애덤 드라이버)가 마지막으로 내뱉는 말은 고해성사를 기대한 관객들을 강렬하게 배반한다. 영화가 이미 여러 관점에서 유죄함을 보여주었기에 더욱 기괴하다. 그러나 결투재판의 끝에 진실 따위가 있을 리 없으며 성범죄자는 결코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법이 없다. 영화는 영화가 할 수 있는 가장 수치스러운 방식으로 그와 그의 메시지를 조롱한다.

마그리트(조디 코머)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훨씬 집요하고 중층적이다. 세상 모두가 그를 배신한다. 남편(맷 데이먼)에겐 명예가 더 중요하다. 가부장이 걱정하는 대상은 피해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그는 즉시 부인을 강제로 범함으로써 손상된 자존심을 회복한다. 시어머니(헤리엇 월터)가 강조하듯이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진실은 피해자의 증언과 무관하게, 재판이라는 이름의 목숨을 건 도박, 지저분한 싸움 끝에 당도하는 어떤 장소이다.

여자는 감히 남자를 고발한 죄의 댓가로 처형대에 먼저 묶인다. 재판과 상관없이 이미 유죄이다. 성범죄의 피해자는 무조건 벌을 받는다. 관중석을 가득 메운 대중들에게 진실은 관심사가 아니다. 누군가 수치를 당하고 고통받고 죽어 나가는 모습을 구경하며 즐기러 왔다. 그들은 기둥에 묶인 마그리트의 몸에 상상의 불을 지른다. 화형은 집행되고 여자의 영혼을 태운다.

그리 명예롭지 않게 진행된 싸움으로 명예를 되찾은 사람은 가부장이다. 그가 주인공이 된다. 수치스럽게 전시되어 있던 여자와 아기는 전리품이 된다. 아이의 친부가 모호하다는 점은 한때 세상 모두의 적이었던 여자에게는 씁쓸한 위안이 된다.

포스터: 라스트 듀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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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Review

Geek, Tarrot

기예르모 델 토로의 팬이자 호러필름 덕후로서, 새로 나온 영화 <Nightmare Alley>를 보기 전에 원작을 먼저 읽어 보기로 마음 먹었다. 구글플레이에서 이북으로 구입했다.1 구글에서 구입하면 별도의 앱을 설치하지 않더라도 브라우저에서 바로 읽을 수 있어서 좋다. 파이어폭스에서도 문제없이 동작한다.

번역본 표지 (그림: 이윤미, 디자인: 이승욱)

윌리엄 린지 그레셤의 책은 처음 접한다. 예상대로 술술 읽혔다. 중간에 두어 번 끊고 반나절 만에 끝을 봤으니. 책의 서문은 동료 하드보일드 작가였던 닉 토시즈가 썼는데, 소개글들이 종종 그러하듯이 작품의 내용을 직간접적으로 누설하고 있을까봐 과감하게 건너 뛰고 진행했다.

본편은 교묘하게 순서를 섞어놓은 스물두 장의 메이저 아르카나, 그러니까 타로카드를 소제목으로 쓰고 있다. 각 챕터가 한 장의 타로카드인 셈이다. 첫 번째 카드인 바보(The Fool)에서 시작해서 마술사, 여사제, 세계 등등을 거치고 마지막 스물두 번째에는 매달린 남자(The Hanged Man)로 끝난다. 프로이트 정신분석과 오컬트에 대한 작가의 관심도 읽을 수 있지만 역시 타로카드가 가장 중요한 상징으로 등장한다. 각 카드에 담긴 오컬트적 의미 및 해석을 잘 알고 있다면 더 풍부하게 읽어나갈 수 있을 것 같다. 잘 모르더라도 모든 챕터는 카드 도상과 이름, 간략한 핵심 정보를 던져주고 시작하므로 내용을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다.

첫 챕터의 도입부

22장의 메이저 아르카나와 소제목을 자세히 비교해 보면 미묘하게 다른 두 개의 제목이 눈에 띈다. 여섯 번째 소제목은 사자의 부활(Resurrection of the Dead)인데 대응하는 타로카드는 심판(Judgement)이다. 기독교의 종말론에 의하면 죽은 자들이 다시 부활하여 마지막 심판을 받으므로 크게 이상한 변형은 아니다. 열여덟 번째 소제목은 시간(Time)이고 타로카드는 절제(Temperance)이다. 이건 연결이 잘 안 된다. 네러티브를 위해 다소 무리하게 변형시킨 게 아닌가 의심된다.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챕터, <바보>는 주인공 스탠 칼라일이 카니발 프릭쇼의 한 부스에서 뱀과 함께 지내며 닭의 목을 물어뜯는 기인(geek)을 관찰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바보>는 기인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스탠 칼라일이기도 하다. 소설을 끝까지 진행하다 보면 확신하게 된다. 타로카드 <바보>는 히브리 문자 알레프(א)와 대응한다. 뜬금없이 떠오른 사실이지만, 보르헤스는 자신의 단편에서 지구상의 모든 지점을 포함하는 공간 속의 한 지점을 알레프로 칭한 바 있다.2물론 이 둘 사이에 어떤 연관관계가 있는 건 아니다. 그저 우연일 것이다. 바보 카드에 내러티브 전체가 응축되어 있다. “알록달록한 광대 옷차림으로 세상 끝 낭떠러지 위에서 눈을 감고 걷는 자”로 정의되어 있는 <바보>란 긱쇼의 알콜중독자이기도 하고 그를 혐오하는 주인공이기도 하며, 소설 밖의 작가 자신이기도 하다.

기인이라는 우리말 번역이 적절한 지 잘 모르겠다. 닉 토시즈의 서문에는 영단어 geek 과 관련해 꽤 재미있는 사연이 소개되고 있다.

카니발 업계에서 살아 있는 닭이나 뱀의 머리를 물어뜯는 야생 인간을 뜻하는 ‘geek(바보, 얼간이, 잘 속는 사람을 뜻하는 ‘geck’에서 유래했는데 이 단어는 적어도 16세기 초반부터 19세기까지 사용되었다)’이라는 단어는 그레셤이 <나이트메어 앨리>에서 소개하기 전에는 일반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1947년 11월 당시 인기를 끌었던 냇 ‘킹’ 콜 트리오는 <The Geek>이라는 음반을 출반했다.

닉 토시즈의 서문

Nerd, 덕후와 유사한 의미로 사용되는 오늘날의 용법으로 자리잡기까지 꽤나 우여곡절을 겪어 왔을 이 단어의 운명을 저 당시의 그레셤이 짐작이나 했을까.

몇 년 전 심심풀이로 타로점을 봐주곤 하던 직장동료분이 타로점의 가치에 대해서 평했다. 타로패가 미래를 예언하거나 거기에 어떤 초현실적인 힘이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어떤 선택지를 취해도 상관없을 소소한 선택의 기로에서 간단히 마음 정하기 힘들 때 동전이나 주사위 보다는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무작위한 방향을 가리키면서도 독특하고 상징적인 방식으로 의미와 동기를 부여한다. 꽤 재미있는 설명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