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ies
Book Review

가사, 돌봄노동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는 반려자인 메리 번즈Mary Burns의 사망 후, 메리의 여동생 리디아와 살았다. 리디아마저 죽은 후에는 마르크스 집안의 하녀였던 헬렌 데무스Helene Demuth가 엥겔스를 돌보았다. 헬렌 데무스가 죽은 후에는 독일사회민주당의 지도자들이 엥겔스를 돌보는 사람으로 루이제 카우츠키Luise Kautsky를 지정했다. 마르크스의 딸인 엘리노어 마르크스Eleanor Marx는 당시 이에 분개했다.

이라영, <<정치적인 식탁>>, <혼자 못 사는 남자들>

이 대목을 읽고 자크 아탈리의 마르크스 평전이 생각나서 뒤적여 봤다.

11월 18일, 헬레나 데무트가 암으로 죽는다. 마르크스와 예니가 바랐던 대로 그녀도 하이게이트 묘지에 있는 마르크스일가의 무덤 안에서 마르크스부부와 어린 해리 곁에 매장되었다. 나흘 뒤 엥겔스는 차티스트주의자들의 오랜신문에다 그녀에 관해 쓴다.

“마르크스가 죽은 이후에도 내가 일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대부분 집에 있는 그녀의 존재가 가져다 준 햇빛과 후원 덕분이었다.”

자크 아탈리, <<마르크스 평전>>, p.644.

헬레나 데무트는 예니의 하녀였을 뿐 아니라 마르크스의 원고들을 정리하는 일도 도왔다.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헬레나는 마르크스의 아들을 낳기도 했다. 정확히 서술하자면, 예니가 장기간 집을 비웠을 때 덜컥 임신하고 결국 아들을 낳았지만 누구의 아들인지는 끝까지 털어놓지 않았다. 정황상 마르크스의 아들임이 분명한데 난처해진 친구를 끔찍히도 생각하는 엥겔스가 끝까지 자신의 아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그런 뻔한 거짓말에 속을 사람이 아니었으나 예니도 끝내는 마르크스를 용서했던 것 같다. 마르크스 가족과 엥겔스는 헬레나를 단순한 하녀가 아닌 진정한 가족으로 여겼고 마르크스 사후 엥겔스의 집으로 옮겨간 것도 경제적인 이유와 더불어 마르크스의 방대한 유고를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엥겔스는 헬레나의 죽음을 진정으로 슬퍼했던 것 같다.

F. 레스너라는 한 증인은 같은 사실을 다르게 소개한다.

“헬레나 데무트를 잃게 된 것이 엥겔스로서는 아주 고통스러웠다. 다행히도 얼마 안 가서 루이제 카우츠키, 오늘날에는 프라이베르거 부인이 된 그녀가 빈을 떠나 런던으로 와서 앵겔스의 집을 관리하기로 결정했다.”

같은 책, p.645.

루이제 카우츠키가 엥겔스의 집으로 들어가게 된 배경도 사실 그리 단순하지는 않다. 독일 사회민주당 내의 정치투쟁과 관련되어 있다. 당시 마르크스를 비판하던 베른슈타인이 선점하기 전에 자신의 세력을 보내고 싶었던 베벨과 리프크네히트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였다. 마르크스의 딸 엘레아노르는 루이제 카우츠키와 그녀의 새 남편 프라이베르거가 아버지의 지적 유산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상황을 걱정했던 것 같다.

프라이베르거 부부는 엥겔스의 집 일부를 차지하고, 그 집에다 자기네 이름까지 갖다 붙이고, 전에 카우츠키 부부가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엥겔스를 자기네 지배 아래에 붙잡아두고 있는 듯했다. 엘레아노르는 자기 언니에게 이런 상황에 대해 터놓고 얘기했다.

같은 책, p.651.

이렇게 써놓고 보니 이라영 선생님이 제기한 문제를 흐리는 서술이 되어버렸다. 당시 상황을 조금 더 상세히 바라보고 싶었다. 분명히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당시 대부분의 남성들이 그러했듯이 가사노동을 여성의 일로 여겼고 평생 여성들의 돌봄에 의지하며 살았다. 급진적인 지식인의 대명사 같은 존재들도 일상 속에서는 가부장제가 정한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다. 화담 서경석의 일화는 더 직설적이다. 허균의 아버지인 허엽이 스승이었던 서경석의 별장에 찾아가 하인을 시켜 밥을 짓게 하려다 보니 솥 안에 이끼가 가득해서 까닭을 물었고, 서경석이 이렇게 대답했다는 것이다. “물이 막혀서 엿새를 집사람이 오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오랜 동안 식사를 못하였다. 그러니 분명 솥에 이끼가 끼었을 것이다.” 아내가 없으면 밥을 굶고 이를 당연하고도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바라보았던 시절, 참으로 미개했던 시절이다, 라고 끝내면 좋겠지만 슬프게도 오늘날과 무관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른 방식으로 밥 타령을 한다. 집밥의 가치에 대해 지겹도록 말하다가 이제는 홀로 밥 먹는 남성에 대한 연민으로 어쩔 줄 몰라 한다. 혼자 밥 잘 해먹는 남자들도 많은데, 이런 남자들은 보편적이지 않은 사례라며 밀어내려 한다. ‘남성연대’는 주방에 자주 들락거리는 ‘같은 남자’들을 싫어한다. 가부장제는 여성들이 하던 성 역할에 참여하는 남성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런 남자들이 많아질수록 성 역할이 깨지기 때문이다.

이라영, 같은 책.

지식은 확실히 세상을 바라보는 감각의 해상도를 높힌다. 흐릿한 실루엣으로 보이던 부분을 더 선명히 파악할 수 있게 되는 계기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