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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피노키오

피노키오와 델 토로

기예르모 델 토로의 영화를 볼 때마다 론 펄먼을 어디에 배치했는지를 확인한다.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델 토로는 투자자와 제작자의 반대가 있더라도 기필코 론 펄먼을 캐스팅하곤 하기 때문이다. 둘 사이의 친분관계를 떠나서 델 토로가 론 펄먼을 자신의 페르소나로 여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론 펄먼은 이번에 공개된 <피노키오>에서는 파시스트(혹은 파시즘 그 자체)인 Podestà의 목소리를 연기하고 있다. <크로노스>, <악마의 등뼈>, <판의 미로>에서 보았던 바로 그 파시즘의 망령이다. 19세기의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하던 피노키오가 1930년대로 옮겨졌다기 보다는 파시즘, 전체주의, 군부 독재에 대한 기예르모 델 토로의 편집증이 피노키오라는 작품을 선택한 것 같다.

파시즘은 일회적이고 특수한 역사적 현상이 아니며 모더니티와 자본주의의 본질 속에 내재하는 부정적 잠재력이고 바로 지금 우리 사회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현상이기에 델 토로의 집요한 관심은 정당하다.

파시즘은 패배했지만 관념과 주장으로 여전히 살아 있고, 앞으로도 계속 살아남을 것이다. 파시즘은 끝장난 적이 없기 때문에 ‘다시 태어날’ 필요도 없다.

『파시즘』, 마크 네오클레우스, 도서출판 이후, 198p.

피노키오가 대중 앞에 처음 등장하는 장면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성당에서 미사를 올리고 있던 사람들은 자유롭게 움직이고 말도 하는 나무 소년을 보고 깜짝 놀란다. 일부는 악마의 소행이라 의심하기까지 한다. 제페토는 피노키오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며 꼭두각시 인형에 불과하다고 둘러댄다. 하지만 파시스트 포데스타의 아들은 예리하게도 피노키오가 줄에 묶이지 않았다는 점을 간파한다. 포데스타는 그렇게 줄이 없는 피노키오에게 ‘누가 너를 조종하는 거냐’고 묻는다. 피노키오는 질문으로 대답한다.

아저씨는 누가 조종하는데요?

영화는 델 토로 특유의 어두운 판타지와 서글픈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지만 케이트 블란쳇이 원숭이 스파짜투라의 목소리를 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서너 배 밝게 감상할 수 있다.

제페토와 스파짜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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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문현답

바둑 세계 대회 시작 이래 볼 수 없었던 성 대결을 성사시킨 최정 9단은 중앙일보에 여성 바둑 기사로서의 한계를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여자가 남자보다 왜 바둑을 못 둘까’라는 질문을 정말 많이 들었다. 그 이유를 계속 찾았는데 찾기 시작하면 끝이 없었다. 이유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라면서도 “그 이유를 계속 찾을수록 무의식적으로 사회적 편견을 갖게 되고, 내가 원하는 곳에 닿을 가능성이 점점 낮아진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그 이유를 찾기보다 내가 원하는 목표에 집중하려고 한다”라고 말했어요.

허스트중앙 엘르, <바둑 역사상 최초! 세게 메이저 준우승한 여성 기사 최정 9단이 맞서온 편견>, 2022. 11. 11.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던져오던 어려운 응수타진에 가장 완벽한 정수를 찾아 착수한 최정 선수. 정말 이 선수의 헤아리기 어려운 그 깊이에 매번 감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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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 9단

바둑실력뿐 아니라 인품도 너무나 훌륭하다. 삼성화재배 결승이 끝나고 이뤄진 기자회견 분위기는 승리한 신진서보다 패배한 최정에게 더 큰 관심이 쏟아지는 느낌이었다. 한 분야에서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으면서도 그저 그뿐인 사람도 있는데 최정 9단처럼 다방면에서 완성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도 있다. 이 선수가 앞으로도 계속 좋은 성적 거두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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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C

바둑, 단상

어제 치뤄진 2022년 삼성화재배 4강전. 최정 9단이 국내 랭킹 2위이자 상대 전적에서 0:5로 밀리고 있던 변상일 9단을 상대로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지금까지 여성 기사가 세계 대회에서 거둔 최고의 성적은 국내 국수 타이틀을 보유자이기도 했던 루이나이웨이(芮迺伟)가 거둔 응씨배 4강이다. 최정 선수는 남녀 통합 메이저 세계 대회의 결승에 오르는 최초의 여성 기사가 되었다.

최정 9단과 변상일 9단 기보 이미지

81, 93번과 같은 수들은 프로 해설자들과 AI조차 놀라게 만든 과감한 수였다. 당장 실리를 손해 보는 수이기 때문이다. 81번 수가 실리를 포기하더라도 공격으로 전단을 열어가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수라면, 93번 수는 최정 선수의 깊은 수읽기 능력을 보여주는 묘수이다.

변상일 9단은 별다른 고민 없이 94로 막았다가 95번 수를 맞고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스스로의 뺨을 세게 때리고 눈물을 훔치며 울기도 했다. 옆자리에 앉아서 대국을 하고 있는 최정 9단은 크게 내색하지 않았지만 매우 마음이 불편했을 것이다. 바둑이 끝나고 뛰쳐나가는 변상일 선수의 뒷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나서야 비로소 활짝 웃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다. 코로나 시대로 규칙이 바뀌어 세계 대회의 경우 보통 온라인 대국으로 치뤄지는데 국내 선수끼리 대국하는 경우에는 같은 방에 나란히 앉아 두게 되므로 나의 행동이 상대방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날 프로 선수들에게는 이기고 지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겠지만 바둑이 그 이상의 무엇이라고 여겼던 시절을 기억하는 입장에서 보면 쓸쓸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대부분의 기사들은 패배가 고통스럽더라도 상대 선수에 대한 예의와 품위를 지키려고 노력한다. ‘중요한 승부에서 패하고도 마음이 아무렇지 않다면 그것은 이미 프로가 아니다’라고 했던 이창호 9단도 이기나 지나 크게 동요하지 않는 모습으로 유명했다. 그런 그의 면모는 성적과는 별개의 어떤 경지를 느끼게 했고 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그를 바둑의 신으로 존경하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짤: "바둑 ㅇ같이 두네"
이세돌9단이 알파고를 상대로 1승을 거두는 대사건 후 네티즌 사이에 유행하던 합성이미지.

AI가 인간의 바둑을 이기면서 그동안 여러가지 의미를 가지던 바둑이 단 한 가지의 의미로 바뀌어 가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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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Quote

범죄의 정의

페르 발뢰와 나는 ‘마르틴 베크’ 시리즈로 스웨덴 사회가 십 년에 걸쳐서 변해가는 모습을 기록하고자 했습니다. 말하자면 스웨덴 사회를 해부하려 했습니다. 우리는 좌파의 시각에서 사회를 묘사하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처음에 시리즈의 부제를 ‘범죄 이야기’라고 붙였는데, 여기에서 범죄란 말을 사회가 노동계급을 버렸다는 뜻으로 사용했죠.

마이 셰발, <<로재나>>, 한국어판 서문

박찬욱의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소품으로 잠깐 등장하는 것을 눈여겨 보고 바로 구입한 국내판 마르틴 베크 시리즈의 첫 편을 펼치니 이런 근사한 서문이 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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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C Press

집값 상승 팩트체크

대선 기간 중 집걱정끝장넷에서 발표한 기획 보도자료.

  1. 주거빈곤가구 200만, 과장된 숫자가 아니다
  2. 임대차법 개정이 전월세 폭등의 원인이다?
  3. 집값 상승의 원인 공급부족에 있다?
  4. 주택가격 상승의 주 원인은 저금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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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log

치자나무꽃

인색한 하늘 야속하여 틈틈히 수돗물을 뿌렸더니 어느새 하얀 꽃이 피어났다. 치자꽃을 볼 때마다 그 단순명료한 구조와 색상 때문에 어딘지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강렬하게 마음을 사로잡는 향기를 맡아보면 쥐스킨트의 쟝 그르누이가 궁극의 향수를 몸에 쏟자 파리의 빈민들이 달려들어 뜯어먹는 그 결말이 쉽게 납득이 되는 것이다. 치자꽃 향기는 확실히 어떤 소유욕을 자극하는 면이 있다.

빌리 홀리데이의 치자나무꽃1사실은 개량된 원예품종인 꽃치자 머리장식 시그니처도 유명하다. 머리를 손질하다가 왼쪽 옆머리를 태워먹고 이를 가리기 위한 임기응변이었다고 한다. 반응이 좋자 이후로도 꾸준히 애용했다는 것이다.2참고: https://www.vogue.com/article/billie-holiday-gardenia-flower-hair-history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흑인 최초 아카데미 조연상을 받은 해티 맥데니얼이 시상식에서 치자꽃으로 장식했다고 하는데 우연인지 어떤 다른 맥락이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검은 머리에 장식한 하얀 꽃은 단순한 장식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걸까?

footnote
  • 1
    사실은 개량된 원예품종인 꽃치자
  • 2
    참고: https://www.vogue.com/article/billie-holiday-gardenia-flower-hair-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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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itics

선거, 단상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는 너무나도 양식화되어 있고 지방선거는 더욱 더 그러해서 스스로를 우파라 칭하는 자들도 좌파라는 자들도, 극우 파시스트들도, 운동권 출신이라는 진보 어쩌고 후보도 번호와 색깔만 다를 뿐 똑같은 뽕짝메들리를 틀어대며 돌아다닌다. 선관위는 유세차량에서부터 선거과정의 세세한 요소들을 규격화하는 방식으로 제도를 다듬었고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이제 감도 안 잡힌다. 그냥 선거란 그런 것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암울한 생각만 든다. 색깔과 번호 외에는 도무지 구별되지 않는 그렇고 그런 사람들이 노래하고 춤추고 욕하고 떠들다가 꾸벅 절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으니 누구라도 찍어야 세상이 바뀔 거라고 말하는 게 최선일 리는 없다.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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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Science

동반자, 잡초

하지만 잡초들에겐 적어도 하나의 공통된 행동 양식이 있다. 그들은 인간과 함께 번성한다는 것이다. 잡초는 기생식물이 아니다. 그들은 인간이 없어도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우리 곁에서 유독 번성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자연계에서 그들의 생태적 협력자다. 잡초는 우리가 땅에서 하는 일을 좋아한다. 숲을 청소하고, 땅을 파고, 농사를 짓고, 영양분이 풍부한 쓰레기를 버리는 것 말이다.

<< 처음 읽는 식물의 세계사>>, 리처드 메이비. 2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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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bour Politics

52시간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윤석열 정부의 노동시간 유연화 정책과 관련해 “생산직은 (사무직과 달리) 주 52시간 이상 일하지 못하게 된 것에 대한 반발이 있다”며 주 52시간 상한제 적용 대상에서 배제할 수 있다는 태도를 밝혔다.

한겨레, 5월 17일, <이준석 “생산직, 주 52시간 이상 원해”…노동계 “임금구조 왜곡 간과”>

52시간 이상 일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임금이 낮으니 잔업하고 특근하는 거지. 32시간 정도 일하게 하고 52시간 이상의 돈을 주는 게 바람직한 해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