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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너

1940년대 펄프 픽션에서 기본 아이디어를 가져온 셰인 블랙의 영화 <키스 키스 뱅뱅 (2005)>에는 재치 넘치는 대화가 많이 나온다. 주인공 해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하모니(미셸 모너핸)에게 미안하다는 의미로 “I feel badly“라고 하자, 하모니는 ‘badly’ 대신 ‘bad’를 써야 한다며 즉각 교정해 준다.

‘Badly’는 부사야. 그러니까 ‘feel badly’라고 하면 네가 느끼는 기능 자체가 고장났다는 뜻이 되는 거지.

해리는 이렇게 얻은 ‘지식’을 페리(밸 킬머)와 대화하면서 어설프게 써먹으려 한다. 페리가 화를 내며 그만 꺼지라는 의미에서 내뱉은 말에 딴죽을 건다.

페리: 가서 나쁜 꿈이나 꾸고(sleep badly), 질문이 있어도 연락하지 마쇼.
해리: bad
페리: 뭐라고?
해리: ‘Sleep bad’라고 해야죠. 안 그러면 잠을 자는 기능이…
페리: 뭔 개소리야? 문법을 어디서 처배운 거야? badly는 부사라고. 꺼져.

게임 <사이버펑크 2077>에 등장하는 캐릭터 주디 알바레스는 나이트시티 최고의 브레인댄스(Braindance, BD) 기술자이며 목스(Mox)라는 이름의 여성갱단 소속이다. 사이버펑크 세계관에서 브레인댄스란 신체 감각, 감정, 생각을 포함한 인간의 경험을 총체적으로 기록하고 재생하는 기술이다. 브레인댄스는 누군가의 경험을 그대로 재현할 뿐 아니라 당시의 생생한 감각, 희로애락의 감정을 직접 체험할 수 있게 한다. 주디는 BD가 “순수한 형태의 감정”이라고 말한다.

주디는 레즈비언이다. 주인공 캐릭터인 V가 여성일 경우에만 그녀와 친구 이상의 관계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런 과정의 정점에 있는 퀘스트가 <깊이 빠지다>1영어판 퀘스트 제목은 <피라미드 송>이다. 퀘스트의 제목이 라디오헤드의 곡 제목이기도 하고 내용에 있어서도 그 유명한 뮤직비디오를 노골적으로 오마쥬한다.인데, 지연된 즐거움을 주는 소소한 대화 선택지가 있다. 댐 건설로 수몰된 고향 마을로 다이빙해 들어가는 내용의 퀘스트 도입부에서 주디의 다이빙슈트가 잘 어울린다고 칭찬하면 ‘맥스텍 유니폼을 입은 모습을 봐야 하는데‘라고 한다. 그런 것도 있냐고 물으면, 내기에서 땄고 아직 옷장에서 적절한 때를 기다리고 있다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인다.

별 의미없이 주고받은 농담같지만, 한참 후에 주디의 집에 가보면 실제로 맥스텍 유니폼세트를 찾을 수 있다. 물론 다이빙슈트 핏을 칭찬하지 않고 넘어갔다면 맥스텍 유니폼도 없다. 이런 게 CD Projekt RED의 유머감각일 것이다.

주디는 V와 함께 다이빙하는 경험을 브래인댄스로 녹화하고 싶어 한다. 다만 이번에는 두 사람의 뇌가 연결된 채 같이 녹화한다는 점이 다르다. 이런 특수한 설정 때문에 V는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물속에서 주디가 떠올리는 어린 시절 기억을 마치 자신의 기억처럼 감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조부모 슬하에서 자란 주디가 어린 시절 또래들로부터 따돌림받았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주디가 숨겨놓은 인형도 찾게 되는데, 주디가 일방적으로 좋아하던 친구의 인형이었다. 호감이 있지만 그 감정을 인정할 수 없어서 반대로 행동했던 것일까. V는 주디의 회상을 들으면서 생생한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물속의 성당에서는 어린 주디가 울림을 느끼기 위해 냈던 그 소리를 듣는다. 이후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V는 주디의 이미지를, 주디는 V의 이미지를 영원히 소유하게 된다. 육체적인 결합 이전에 감정과 감각의 결합이 우선했다.

또 다른 캐릭터인 팬앰에게도 독특한 연출이 준비되어 있다. 퀘스트라인의 끝부분에서 V와 팬앰은 바실리스크라는 이름의 군사 장비에 몸을 싣는데, 바실리스크에 설비된 감각 피드백 기술 덕택에 둘의 신경계가 하나로 얽힌다. 그로테스크한 조명이 비추는 좁은 조종석에서 두 사람은 상대의 감각을 자신의 것처럼 느끼면서 사랑을 나눈다. 이쯤 되면 “feel badly”라는 문법적 농담에 뼈가 생긴다. 기분에 대한 형용사가 아니라 감각하는 기능을 수식하는 부사가 필요해진다.

BD는 80년대의 상상력에 크게 기대고 있는데, 더글라스 트럼벌의 영화 <브레인스톰>에 등장하는 경험을 기록하고 재생하는 기술, 그리고 윌리엄 깁슨의 소설 <뉴로맨서>에 나오는 simstim(simulated stimulation) 장치가 큰 영향을 미쳤다. 비슷한 시기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도 자신의 잠재의식을 암호화키로 사용하는, 정신분석과 사이버펑크가 매시업된 느낌의 기술이 등장한다는 점도 언급해 두고 싶다.

제임스 캐머런이 각본을 쓰고 캐서린 비글로우가 연출한 1995년 영화 <스트레인지 데이즈>에도 이와 유사한 장비가 등장한다. SQUID라 불리는 이 장치는 로드니 킹 사건과 1992년 LA 폭동의 기억을 불러오는 세기말의 로스앤젤레스를 배경으로, 주로 스너프 디스크를 생산하고 유통하는 데 사용된다. 특히 희생자의 눈을 가린 채 스퀴드를 씌워, 폭행당하는 자신을 가해자의 시점으로 보도록 강제하는 시퀀스는 극도로 끔찍하다. 주인공 레니(레이프 파인스)는 이 디스크를 체험하고 나서 심각한 고통에 시달리는데, 이는 안전한 거리에서 폭력을 관음해 온 관객들을 향한 윤리적 힐난처럼 기능한다. 이 영화에서 스퀴드는 카메라의 극단적인 은유다. 스너프를 생산하는 미디어이면서, 동시에 부조리한 현실을 폭로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리리스가 남긴 기록은 무고한 흑인 셀럽을 살해하는 경찰의 폭력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증거로 작동하며, 영화는 이미지가 범죄의 공범이 될 수도, 진실을 드러내는 증언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사이버펑크 2077>에서 조니(키아누 리브스)는 V에게 아라사카의 미코시가 왜 나쁜지 묻는다. 미코시란 기업이 인간의 인격 구성체와 디지털화된 정신체를 수집해서 보관하는 데이터베이스, ‘영혼의 감옥’을 지칭한다. 게임 상에서 미코시는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영생의 프로젝트로도, 인격을 편집하고 조작하는 기술로도 그려진다. 이렇게 인격의 핵심요소가 디지털화되어 조작의 대상이 되는 세상에서 나의 존재는 무엇이 담보하는가? 데카르트 식으로 사유하자면, 감각은 속일 수 있고, 꿈과 현실을 구별하기 어렵고, 심지어 악마가 모든 믿음을 조작할 수 있다고 가정하면서도 완전히 의심할 수 없는 출발점은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게 의심하고 생각하는 자가 과연 나인가? 나의 사이버웨어에 복사된 다른 누군가의 정신체가 대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이버펑크 세상을 지배하는 기업의 입장에서는 하찮은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자본의 관점에서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인간으로서 노동자는 관심 대상이 아니니까.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노동 자체가 필요한 것이며, 심지어 노동을 제공하는 주체가 인간일 필요도 없다. 조니는 미코시를 테러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사이버펑크식 억압 구조에 균열을 만들려고 한다. 플레이어는 대부분 조니의 의지를 대리 수행하는 길, 미코시를 파괴하려는 싸움을 하게 된다.

푸엔테스의 <아우라>가 떠오른다. 광고를 보고 찾아간 노파 콘수엘로의 고풍스러운 집에서 그녀의 남편 요렌테 장군이 남긴 미완의 기록을 완성하는 일을 진행하게 된 젊은 사학자 펠리페가 주인공이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콘수엘로의 조카인 아우라와 만난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펠리페와 요렌테, 아우라와 콘수엘로의 이미지들이 혼란스럽게 겹친다. 이 몽환적이고 초현실적인 짧은 고딕 소설은 이인칭 시점으로 쓰여있다. 이 독특한 서술방식은 모든 문장을 최면술사의 주문처럼 만들고, 시간과 공간, 이성과 환상, 현실과 꿈, 산 자와 죽은 자 간의 경계를 점진적으로 무너뜨린다. 종국에는 ‘너’로 호명되는 존재가 펠리페인지 요렌테인지 다른 누구인지도 모호하게 된다. ‘너’라는 주어는 ‘나’와는 달리 본래 고정된 정체성이 없는 언제든 다른 대상을 가리킬 수 있는 빈자리가 아니던가.

<아우라>의 이인칭은 그래서 결정적이다. ‘너’는 언제나 호출되지만 결코 고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독자를 가리키기도, 인물을 가리키기도, 이미 죽은 자의 잔향을 가리키기도 한다. 사이버펑크의 세계에서 ‘나’가 데이터로 분해되고 기업의 저장소에 보관될 수 있다면, ‘너’는 오히려 마지막까지 붙잡히지 않는 대명사다. 미코시가 봉인하려는 것은 인격이지만, <아우라>가 끝까지 미끄러뜨리는 것은 정체성이다. 누가 생각하고 있는가, 누가 느끼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주어를 잃는다.

어쩌면 우리는 늘 이렇게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기억을 빌려 사랑하고, 누군가의 언어를 빌려 사과하며, 누군가의 시점으로 세계를 통과한다. 그럼에도 어떤 순간에는—물속의 성당에서 울림을 시험하던 어린아이의 목소리처럼—도저히 대체될 수 없는 감각이 남는다. 그것은 문법으로는 교정할 수 없고, 기술로는 완전히 포획되지 않으며, 이인칭으로 불릴 때 가장 또렷해진다. 결국 남는 것은 선언이 아니라 호명이다. 어느 순간 내 존재를 확신하기 힘든 순간이 올지라도, 누군가에게 불리고, 그 부름에 떨리듯 반응하는 순간만큼은 대체될 수 없다.

footnote
  • 1
    영어판 퀘스트 제목은 <피라미드 송>이다. 퀘스트의 제목이 라디오헤드의 곡 제목이기도 하고 내용에 있어서도 그 유명한 뮤직비디오를 노골적으로 오마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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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국수, phở

흥미로운 베트남 쌀국수의 기원을 찾는 여행 기록. 쌀국수의 기원지로 알려진 곳인 하노이에서 남동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남딘성 반꾸(Vạn Cú) 마을과 하노이를 오가며 취재한다.

“아니, 그건 조금 더 복잡한 얘기예요.” 응우옌이 말해 내게 의외를 안겼다. 나는 또 한 번의 반전이 이어질까 긴장했다. “퍼의 한 형태는 반꾸에서 시작됐지만, 실제로 형태를 갖춘 건 하노이예요. 반꾸 사람들 덕분이죠.” 퍼는 하노이에서 훨씬 더 맑은 국물과 적은 피시소스로 발전했다고 그녀는 말했다. 20세기 초에 많은 반꾸 사람들이 하노이로 이주해 왔고, 부자나 프랑스인들만 먹을 수 있던 소고기 쌀국수를 만들 기회를 보았다고 그녀는 덧붙였다. “오늘날 퍼는 모두의 음식일지 몰라도, 100년 전,” 응우옌은 말했다, “그건 부자들을 위한 요리였어요.”

그 말이 이해됐다. 퍼가 베트남 북부에서 시작됐다는 데에는 모두가 동의하지만, 정확히 어디서 비롯됐는지에 대해서는 영영 합의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퍼는 프랑스와 중국의 영향이 일부 섞이고, 여기에 베트남인의 기지와 자립심이 더해져 탄생한, 베트남의 복잡한 역사를 반영하는 음식이라는 것이다. 남딘 어딘가에서 시작되어 하노이에서 완성되었고, 이제는—그럴 만한 이유가 충분하기에—전 세계가 사랑하는 음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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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펑크

Cyberpunk Easy Mode에서는 사이버펑크로서 살아가는 규칙 세 가지를 제시한다.

  1. 스타일이 본질에 우선한다(Style over Substance)
  2. 태도가 전부다(Attitude is Everything)
  3. 엣지 위에서 산다(Live on the Edge)

엣지는 위험을 즐기는 자, 한탕주의자들이 가는 불분명한 곳이야. 엣지에서는 돈, 명성, 심지어 목숨까지 원칙이나 한탕만큼이나 모호한 것에 걸지. 사이버펑크로서 넌 행동 그 자체가 되길 원해. 반란을 일으키고, 불을 붙이고, 거대한 대의에 뛰어들고, 큰 문제를 위해 싸워. 빠르게 달릴 수 있는데 천천히 갈 이유가 없지. 위험을 정면으로 맞서고 피하지 않아. 너무 안전하게 놀지 마. 엣지에 헌신하는 거야.

영화 <Blade Runner>의 제목은 사실 윌리엄 S. 버로스의 단편 <Blade Runner: A Movie>에서 따온 건데, 그것 역시 또 다른 소설 앨런 E. 노어스의 <The Bladerunner>에서 가져왔다. 수술용 칼 따위의 불법 의료 장비를 운반하는 밀수꾼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니 말 그대로 “칼을 들고 달리는 사람”이었던 것. 하지만 리들리 스콧은 의미와는 상관없이 강렬하고 미래적인 느낌 때문에 이 제목을 차용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엉뚱하지만 탁월한 선택이었다. 칼날, 혹은 경계 위를 달리는 자 등으로 해석되면서 사이버펑크의 고전에 안성맞춤인 의미를 얻게 되었으니까.

지금까지 인류를 실망시킨 적 없는 CD Projekt RED의 <Cyberpunk 2077>을 최근 다시 플레이했는데 과도하게 몰입한 나머지 후유증을 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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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 페이스

지난해 이 드라마를 보면서 20세기에 인기를 구가했던 티비쇼 몇 가지를 포스트모던하게 짜깁기해 놓은 느낌이 들었고, 거기서 오는 아련한 향수 같은 게 있었다. 시즌 2 티저가 반갑다. 케이티 홈즈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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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재하는 강박

복도훈은 ⟪유머의 비평⟫에서 서효인의 시집 ⟪여수⟫에 수록된 몇 편의 시에 가해진 자기검열1이윤주, “내 문학 작품 속 여혐 수정” 새 풍경, 한국일보, 2017.02.23.이 크게 신경 쓰이지는 않았지만, 시집을 읽고 나서는 수정 이전과 이후의 표현을 비교해 볼 수밖에 없었다고 밝힌다.

그러나 시인의 말을 빌리면 “온갖 곳에 염결성과 예민함을 드러내면서 하필 방종했던” 방식으로 자신의 시에 드러나게 된 여성 혐오적인 표현을 삭제하거나 수정한 부분이 막상 내가 『여수』를 읽을 때는 크게 신경이 쓰이지는 않았다.2복도훈, ⟪유머의 비평⟫, 도서출판b, 40.

시인이 언론에 밝힌 바에 의하면, 시 〈서귀포〉에서 ‘궁둥이’를 ‘몸 어딘가’로 바꾸었고, 또 다른 시에서는 ‘여공’을 ‘젊은이’로, ‘아줌마’를 ‘학부모’로 바꾸었다.3이윤주의 같은 기사, “최근 세 번째 시집 ‘여수’를 출간한 서효인 시인은 작품에서 ‘여성혐오’가 엿보이는 시어를 고치거나 다시 썼다. 시 ‘구미’에서 ‘공장에 다니는 여공들’을 ‘공장에 다니는 젊은이들’로, 시 ‘마산’에서 ‘우리가 모두 아줌마가 되면’을 ‘우리가 모두 학부모가 되면’으로 바꾸는 식이다. 시 ‘서귀포’에서 제주 4ㆍ3항쟁을 회상하는 표현은 발표 당시 ‘젊은 남자는 섬 말 쓰는 아녀자를 잡아서 궁둥이 사이에 대검을 꽂아 넣었다’로 썼지만, 이번 시집을 묶으며 ‘미아들은 섬 말 쓰는 사람들을 잡아다 몸 어딘가에 대검을 꽂아 넣었다’로 바꿨다.” 의미는 알겠는데, 과연 시인이 수정한 표현이 이전의 작품보다 현재의 작품을 더 낫게 만들었을까?

자극적인 표현을 덜 자극적인 표현으로 바꾼다고 폭력이 줄어들 것으로 믿는 것은 ‘민간인 살상’을 ‘부수적 피해’로 바꿔 부른다고 민간인 살상이 줄어든다고 간주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정치적 올바름’의 언어검열이나 완곡어법은 언어의 해방이 아니라 언어의 감옥이 될 공산이 농후하다. 그것은 정신분석적 의미에서 무의식적인 억압-검열보다는 상처와 폭력에 대한 체계적인 ‘부인verneinung’에 가깝다. 그것은 단지 덜 자극적이고 덜 불쾌한 표현의 규칙과 예시를 만들고 그 규칙에 자신의 이름을 서명해 넣는 일을 선호할 뿐이다.4복도훈의 같은 책, 43.

히스테리 환자는 거짓말의 형태로 진실을 말한다. 그가 말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사실이 아니지만, 거짓말은 거짓된 형태로 진정한 불만을 표현한다. 반면 강박증 환자의 진술은 문자 그대로 사실이지만, 그 진실은 거짓말을 위한 진실이다. 슬라보예 지젝은 종종 히스테리를 포퓰리즘에, 강박증을 정치적 올바름에 빗댄다. 포퓰리즘은 거짓말의 형태로 진실을 말한다.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거나 해결이 불가능한 방식으로 문제를 다루면서도, 그 거짓이 실제로 존재하는 분노와 불만을 건드린다. 반면 정치적 올바름은 진실로 거짓말을 한다. 차별과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 언어를 바꾸고 상징적 질서에 규칙을 추가하지만, 정작 사회경제적인 수준에서 근본적인 차별, 불평등은 해결되지 않는다. 지젝은 정치적 올바름을 대리수동성으로 묘사한다.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나거나 실질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행동한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바꿔 나가자. 그래야 전체적으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수 있다!”5슬라보예 지젝, “Repeating Lenin“, lacan.com 복도훈도 유사한 의미의 다른 문장을 인용하고 있다. “그것은 문제를 살아있게 하기 위해서 자꾸만 새로운 답을 내놓는다.”6슬라보예 지젝,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411.

이런 강박은 정치적인 지형 안에서 고압적으로 표출된다. 지젝은 자유주의 엘리트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정치적 무지와 혼란, 맹목을 꾸짖고 모욕하는 것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그들을 고압적으로(patronizingly) ‘이해’한다고 비판했다.7슬라보예 지젝, 앞의 글. 강준만은 “나는 기본적으로 PC 운동의 취지와 당위성엔 동의와 지지를 보내면서도 동의와 지지를 보낼 뜻이 있는 사람들까지 등을 돌리게 만드는 운동방식의 문제엔 비판적인 입장”이라고 밝힌바 있다. “PC운동이 애초에 인간에 대한 예의에서 출발한 것임에도 어떤 사람들이 그 예의를 지키지 않거나 소홀히 대한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너무 거친 비판을 퍼부음으로써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는 건 모순”이라고 했다.8강준만, ⟪정치적 올바름⟫, 인물과사상사, 30.

작가와 작품의 분리라는 주제에서도 유사한 강박을 본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수십 년 동안 노벨문학상 후보 명단에 올랐으나 끝내 수상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9노벨문학상은 종종 납득하기 힘든 이상한 선택들을 하는데, 정치인인 윈스턴 처칠, 포크싱어인 밥 딜런에게 상을 준 일도 그렇지만, 20세기 초부터 내내 이어져 온 어떤 정치적 강박이 작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종종 받게된다. 그가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에게 훈장을 받았기 때문에 노벨문학상에서 멀어졌다고 보는 의견이 많은 것 같다. 그를 심지어 반공주의자라고도 얘기하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정치에 소극적인 보수주의자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그는 유전적으로 시력이 좋지 않았다. 아버지와 할머니도 일찍이 시력을 잃었고, 본인도 국립도서관장에 취임한 5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눈이 멀기 시작했다. 이후 30년 이상을 어둠 속에서 살았다. 그는 그가 자주 묘사한 이미지처럼 중심이 없는 미로 속을 더듬으며 “부유하듯” 살았으며, 누군가 대신 읽어줘야 하는 책으로 가득한 도서관이 그의 세계였다. 세상은 수수께끼였고 그는 그 점을 경이롭고 다행스럽게 여겼다. 그에게 정치적이기를 요구할 수 있을까? 아무리 그래도 피노체트에게 훈장을 받다니 심하긴 했다. 하지만 그러한 결함을 그의 실존적 맥락이나 그가 평생 추구해 온 문학적 맥락을 무시한 채, 그저 그의 윤리적인 결함으로 단정할 수 있는 걸까?

마침 프랑스의 사회학자 지젤 사피로가 쓴 흥미로운 제목의 책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를 소개하는 한겨레 기사가 맥빠지지만 불가피해 보이는 결론을 요약하고 있다.

그렇다면, 작가와 작품은 분리할 수 있는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자칫 허탈하게 들릴 수도 있는 결론이지만, 이 질문에 대해서는 결코 단순하고 결정론적인 답변이 가능하지 않으며, 사안에 따라 꼼꼼하고 합리적인 논의가 필요하다는 취지로 받아들여진다.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재적 분석과 외재적 분석이 모두 필요하고, 문제가 있는 작품이라 하더라도 검열이나 ‘삭제’보다는 경고 문구를 활용하는 게 바람직하다. 출판사 팬 맥밀란이 마거릿 미첼의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2023년에 재발간하면서 이 책이 ‘인종 차별적’이고 ‘유해하다’고 밝힌 것이 참조할 만한 사례다.

footnote
  • 1
    이윤주, “내 문학 작품 속 여혐 수정” 새 풍경, 한국일보, 2017.02.23.
  • 2
    복도훈, ⟪유머의 비평⟫, 도서출판b, 40.
  • 3
    이윤주의 같은 기사, “최근 세 번째 시집 ‘여수’를 출간한 서효인 시인은 작품에서 ‘여성혐오’가 엿보이는 시어를 고치거나 다시 썼다. 시 ‘구미’에서 ‘공장에 다니는 여공들’을 ‘공장에 다니는 젊은이들’로, 시 ‘마산’에서 ‘우리가 모두 아줌마가 되면’을 ‘우리가 모두 학부모가 되면’으로 바꾸는 식이다. 시 ‘서귀포’에서 제주 4ㆍ3항쟁을 회상하는 표현은 발표 당시 ‘젊은 남자는 섬 말 쓰는 아녀자를 잡아서 궁둥이 사이에 대검을 꽂아 넣었다’로 썼지만, 이번 시집을 묶으며 ‘미아들은 섬 말 쓰는 사람들을 잡아다 몸 어딘가에 대검을 꽂아 넣었다’로 바꿨다.”
  • 4
    복도훈의 같은 책, 43.
  • 5
    슬라보예 지젝, “Repeating Lenin“, lacan.com
  • 6
    슬라보예 지젝,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411.
  • 7
    슬라보예 지젝, 앞의 글.
  • 8
    강준만, ⟪정치적 올바름⟫, 인물과사상사, 30.
  • 9
    노벨문학상은 종종 납득하기 힘든 이상한 선택들을 하는데, 정치인인 윈스턴 처칠, 포크싱어인 밥 딜런에게 상을 준 일도 그렇지만, 20세기 초부터 내내 이어져 온 어떤 정치적 강박이 작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종종 받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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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C Quote

트로츠키의 꿈

트로츠키는 1935년 6월 25일 밤, 죽은 레닌과 대화를 나누는 꿈을 꾼다.

“어젯밤, 혹은 정확히 말하면 오늘 새벽, 나는 레닌과 대화를 나누는 꿈을 꾸었다. 주변 상황으로 보아, 그것은 한 배의 삼등실 갑판에서 이루어진 듯하다. 레닌은 침대에 누워 있었고, 나는 그 옆에 서 있거나 앉아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내 병세에 대해 걱정하며 물었다. ‘신경 피로가 누적된 것 같군. 당신은 쉬어야 해…’ 나는 피로를 빨리 회복하는 데 타고난 활력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문제가 더 깊은 곳에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레닌은 단어를 강조하며, ‘진지하게 여러 의사들에게 상담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이미 많은 상담을 받았다고 답하며, 1926년 베를린 여행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레닌을 바라보던 중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나는 이 생각을 빨리 떨쳐내 대화를 끝내려 했다. 내가 베를린에서의 치료 여행에 대해 이야기를 끝마쳤을 때, ‘이것은 당신이 죽은 후의 일이었소’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대신 ‘당신이 병에 걸린 후의 일이었소’라고 말을 바꿔 말했다.”

레닌은 자신의 죽음을 모르고 있으며 트로츠키는 그의 죽음을 알리지 못한다. 그러니 레닌은 계속 살아있는 셈이다. 이런 환상적인 얘기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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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제스처

두 가지 단상.

우리는 정치적 올바름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지만, 많은 경우 진심으로 그 가치를 신봉해서가 아니라 사회적 비난을 피하거나 갈등을 피하기 위해 표면적으로 ‘올바른’ 행동을 할 때가 있다. 이러한 가식적인 행동, 슬라보예 지젝의 용어로 ‘텅 빈 제스처(empty gesture)’는 결코 무의미하지 않으며, 인간 사회에서 필연적이고 불가피하다. 진정한 의미를 완벽히 실현할 수 없는 상황이라도, 다시 말해 ‘진정성’에 기반하지 않더라도, 여전히 공동체 유지를 위해 이러한 상징적 행위가 필요하다.

헌법재판소법 제6조는

재판관은 대통령이 임명한다. 이 경우 재판관 중 3명은 국회에서 선출하는 사람을, 3명은 대법원장이 지명하는 사람을 임명한다.1https://www.law.go.kr/법령/헌법재판소법/(20220203,18836,20220203)/제6조

고 명시하고 있다. 여기서 6명, 즉 국회에서 선출하는 3명과 대법원장이 지명하는 3명에 대한 대통령의 임명 행위는 텅 빈 제스처일 때 비로소 삼권분립이라는 헌법적 가치가 실현된다. ‘진정성’에 따라 반대하는 행위는 확실히 파국적이다. 여기서 임명은 그저 요구되는 것이다. 소시오패스가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인간 행동의 대부분은 상호 작용 자체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다.2애덤 모턴, 『잔혹함에 대하여』

footnote
카테고리
Daylog ETC

어린 왕자

기억 속 첫 크리스마스 선물은 내가 일곱 살이던 해, 셍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였다. 학교 교육조차 충분히 받지 못했던 우리 집 산타할아버지의 눈엔, 아마도 표지도 예쁘고 삽화도 있는 그 책이 일곱 살 꼬맹이에게 딱 맞아 보였을 것이다. 나는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까지 보고 금세 책을 덮어버렸다. 그렇게 책은 시간이 지나 몇 번의 이사를 거치며 사라졌다. 이후 산타할아버지는 몇 해에 한 번씩 띄엄띄엄 선물을 주셨는데, 그건 아마 내가 종종 나쁜 아이였기 때문일 것이다.

고등학생이 되던 해, 은밀히 ‘우정’의 편지를 주고받던 교회 여사친이 여우 이야기를 인용한 일이 있었다. 어릴 적 받았던 첫 크리스마스 선물이 문득 떠올랐다. 도서관으로 달려가 책을 다시 꺼내 읽었다. 당시의 나는 그런 철학적인 동화에 큰 흥미를 느끼지 않았고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편지에 인용하기 좋은 구절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억지로 읽었던 것 같다. 그때 선물할 책은 반드시 내가 먼저 읽어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을 것이다.

선물 고르는 센스가 부족하고, 고집이 세며 권위적이고, 일하지 않을 때는 늘 술에 취해 있었지만, 자식들에게만큼은 언제나 따뜻했던 우리 집 산타할아버지는 이제 뇌졸중으로 몸이 불편해지셨다. 얼마 전 찾아뵈었을 때, 크리스마스 선물 이야기를 꺼내 보았는데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하긴 그깟 크리스마스가 뭐라고 아직 기억하겠는가. 2회차 산타란 없다. 누구나 산타는 처음이고 이런저런 실수를 반복하다가 할만하면 은퇴하고 마는 것이다. 은퇴한 산타는 나무늘보처럼 외롭게 느릿느릿 살다가, 어린 왕자처럼 자기 별로 홀연히 떠나버릴 것이다. 그렇게 누구에게나 인생의 어느 순간, 산타 없는 크리스마스가 찾아오는 법이다.

어린 왕자의 삽화. 작품의 마지막 장, 사막에서 조용히 쓰러져 주저앉은 어린 왕자를 그린 그림이다. 하늘에서는 하나의 별, 아마도 그가 돌아가게 될 별이 빛을 내려 쬐고 있다. 어린 왕자 앞에는 한 떨기 꽃이 피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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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마, 오즈

레딧에 올라온 매우 흥미로운 (Velma characters parallel wizard of oz).

벨마의 빨간 메리 제인
도로시 → 벨마의 빨간 메리 제인 한 켤레
여성성의 신화를 읽는 프레드
허수아비 → 여성성의 신화를 읽고 뇌를 얻는 프레드
스스로에게 헌신하기로 결단하는 노빌
사자 → 스스로에게 헌신하기로 결단함으로써 용기를 얻는 노빌
양철나무꾼: 대프니
양철나무꾼 → 벨마와 키스함으로써 사랑을 얻은 대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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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타, 추억

제임스 캐머런의 아바타를 당시 회사 근처 개봉관에서 보았던 기억이 망령처럼 떠올랐다. 2009년 12월, 추웠지만 두근거렸고 끝내 슬퍼졌던 그날 밤, 피곤한 남자에겐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없었다. 가까운 곳에 앉았지만, 푸른 거인들이 뛰어다니는 스크린은 너무나 멀어 보였다. 미래에서 온 나의 유령과 만나는 내 과거의 유령을 보았다. 시끄럽고 어지러운 환상들이 배회하는 공간에서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우리의 심장은 함께 뛰었고 시공간의 온도를 미세하게 높였다. 붙잡고 싶었고 뿌리치고 싶었다. 수수께끼 같은 인사를, 거짓말을 나누면서 우리는 판도라 행성을 떠났다. 우리가 잠시 그 자리에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끝을 향해 지나온 길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보낼 수 없었던 답장은 어느 버려진 서버에 절절한 이진 코드로 남았다가 무신경한 다른 코드가 덮어썼을 것이다. 미안한 마음은 전할 길이 없다. 그래서 삶이 종종 아프고 외로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