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와 통화를 하다가 깨달음을 얻었다. 내가 이해하기 힘들었던 모든 것이 전제 하나를 바꿔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된다. 그러니 인생의 선배인 게지. 나는 아직 멀었다, 멀었어. 그렇게 펑펑 울고 나니 그동안 미칠 것만 같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편해졌다.
귀가하여 방안을 둘러보니 정성 가득한 흔적들이 곳곳에서 보인다. 그게 내 생각과는 다른 의미들이었던 거야. 하지만 다른 의미로 그러는 게 가능하다고? 세상 모두가 너 같지 않아. 그럼 모든 게 설명된다. 아니, 하지만 전에 나눴던 이런저런 대화들을 보면 설명이 안 되는데? 지난 대화 따위 복기하지 마. 아무런 의미 없어. 그래 상대방의 마음을 착각하긴 했어도, 나는 나대로 사랑할 수 있는 거지. 거기서 삐끗하면 사랑이 증오로 변하는 법.
나는 진심으로 그분의 행복을 빌 수 있다. 고양이가 없지만 다행히 이번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아.
슬라보예 지젝은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고, 나는 거기서 회한이나 자기혐오에 고립되는 태도를 훌쩍 넘어서는 완전히 새로우면서도 평범한 경지를 느꼈다.
우리 부모님은 엄격하진 않으셨지만, 저를 깔보는 듯한 태도를 보이곤 하셨어요. 전 부모님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두 분은 어느 날 밤 병원에서 돌아가셨는데, 다음 날 아침 전화를 통해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이미 컴퓨터 앞에 앉아 일을 하던 중이었죠. ‘다 처리가 된 건가요? 알겠습니다, 수고하세요’라고 말하고는 계속 일을 했습니다. 정말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어요. 무언가 잘못된 것 같았죠. 그렇다고 제가 그런 냉담한 반응을 보인 것에 대해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기는 건 아닙니다.
결말을 알지만 언제 막이 내릴지 모르는 연극의 구경꾼은 낡은 걱정을 깜깜한 미래의 시공간에 내던지고 한눈을 팔 수밖에 없다. 그저 아침 하늘을 바라보며 비가 오지 않기를, 하염없이 맑기를, 바람이 불지 않기를, 사랑이 그저 달콤하기를, 오늘 하루 안온하기를 바랄 뿐이다.
나중에 죽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 말 들을 때가 있었을 게지. 내일과 내일과 내일이 매일처럼 기록된 시간의 마지막 순간까지 답답한 걸음으로 기어오누나. 우리의 수많은 어제들은 바보들을 티끌 같은 죽음 길로 데리고 갔다. 꺼져라, 꺼져라. 짧은 촛불아. 인생은 그림자놀이, 한동안 무대에서 우쭐대고 안달하다 다시는 소식 없는 불쌍한 광대. 소음과 광란이 가득하고 아무런 뜻 없는 바보 이야기.1<맥베스> 5.5.17-27. 이상섭 역, 문학과 지성사, 2017, 674쪽.
기독교「밋쇼ㄴ」대학인 이화(이화(梨花))여자대학에서는 지난 십사(十四)일 학교전통의 신앙과 배치되는 이단 (이단(異端)) 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졸업반 학생 오(五)명을 포함한 십이(十二)명의 학생에 대하여 제명처분을 정식으로 발표하였는데 전에는 교수 오(五)명을 같은 이유로 파면시킨 일도 있어 교육계 뿐만 아니라 종교계에 다대한 파문을 던지고있다. 그런데 동교에서 이단교라고 지적한 교파는 어떤것인가? 작년초부터 부산 (부산(釜山))에서 기독교혁명운동이라하여 문(문선명(文鮮明)=삼육(三六))씨 주도아래 시작되어 작년 사(四)월 서울로 올라오면서 본격적인 교회운동을 하게 되었다는 기독교의 한 분파로서 현재 서울교회 (통일교회)에서 책임자로일한다는 유(유효원(劉孝元)=사이(四二)) 씨의말을 들어보면통일교회는 『기성기독교의교회가 부패할대로 부패한 오늘날 참다운 예수의 진리를 밝히는 것을 사명으로 하는 종교혁명의 봉화를 들었다』 는것이다.
그런데 이 통일교회는 현재 이(二)백여명의 신도와 부산 대구 두 곳에 교회처소를 갖고있는 것인데 이화대학교와 연희대학 (연대(延大))학생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하며 교회운영은 풍경사진 「푸로마이트」를 가두판매하며 사진업을 함으로써 충당하고있다한다.
<이대(梨大)에 제적사태(除籍沙汰)>, 조선일보, 1955년 5월 16일.
문선명은 초기에 엘리트 계층을 포섭하는 데 주력한다. 형식적으로 신선한 논리체계를 갖춘 교리를 개발함으로써 전후 혼란스러운 허무주의에 빠져있던 젊은 지식인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했던 것으로 보인다. 구세주가 한국에서 탄생한다고 주장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자신을 재림예수로 동일시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타락한 천사와 이브 사이의 음란 행위가 원죄이며, 구원받으려면 하나님의 혈통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혈통 복귀” 의식이 교주와의 직접적인 성관계(피가름)을 통해 이뤄졌다는 이탈자들의 진술이 있었다.
치안국 중앙분실에서는 사(四)일밤 서울 신당동 소재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세칭통일교회(世稱統一敎會))의 주재자인 문선명(문선명(文鮮明)=삼육(三六))씨를 구속하였는데 전기문씨는 당년삼십육(三十六)세 임에도불구하고 사십오(四十五)세로 늘려 병역을 기피했다는 병역법위반과 불법감금등 혐의로 구속된 것이라고한다. 그런데 전기통일교회는 현하 기독교의 교리와 위반되는 사교(발교(發敎))라고 하여 앞서 이화대학에서는 통일교회의 신도인 등교 교수 및 학생을 파면 또는 퇴학처분한 사실도 있어 한때 세간에 화재를 던진 바 있었던 것이다.
<통일교주인공(統一敎主人公) 문선명씨구속(文鮮明氏拘束)>, 조선일보, 1955년 7월 6일.
한때 일반의 주목을 끌어오던 통일교회사건 제일(一)회공판이 이십(二十)일상오 서울지방법원 재사(四)호법정에서 윤학로(윤학노(尹學老))판사주심 강서룡(강서용(姜瑞龍))검사 관여아래 개정되었다. 그런데 이 공판은 교리나 기타 문제에 대한 것은 전연 없고 순전히 교주 문선명(문선명(文鮮明))외 삼(三)명에 관한 병역법 위반에 대한 공판이었는 바 피고들은 사실심리에서 연명인상을 시인하였다.
<병역기피시인(兵役忌避是認)>, 조선일보, 1955년 9월 21일.
문선명은 병역법 위반, 불법 감금 등의 혐의로 구속된다. 하지만 이 사건은 그에게는 일종의 전환점, 조직과 전략을 더 정교하게 다듬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또한 ‘피가름’과 관련한 풍기문란 혐의에 대해서 무죄판결을 받음으로써 섹스교라는 비난을 일축할 만한 법적 근거를 얻게 되었다. 60년대 이후부터는 포교를 사회 활동 뒤로 숨기기 시작한다. 예술단, 학교를 설립하고, 성대한 합동결혼식을 연출한다. 또한 국내의 부정적인 여론을 의식, 해외로 눈을 돌린다.
삼(三)일 서울 청파동(청파동(靑坡洞)) 일(一)가 칠일(七一)의삼(三)「세계기독교통일 신령협회 서울교회」에서 전국남녀신도 칠십삼(七十三)쌍의 합동결혼식이 오전 팔(八)시부터 시작되었다.
주례는 이 교회의「선생님」문선명(문선명(文鮮明))씨 부부가 흰예복을 입고 섰고 결혼을 하는 신랑신부의 옷은 한결같이 까운비슷한 흰예복을 길게 입었으며 식장에 참석한 신도들도 신을 제외한 양말장갑까지 모두 하얀 것을 착용하고 있었다.
<통일교도(統一敎徒)들합동결혼식(合同結婚式)>, 조선일보, 1962년 6월 4일.
신도가 된 미국사람들은 살아있는 주님이라는데 매혹되어 혹은 어느 다른 종교와 달리 너무나 뚜렷한 하나님을 앞에 내놓았기 때문에 호기심으로 덤벼들 사람도 적지 않은 것 같다.
이들 교회책임자들에 의하면 인류는 말세를 당하였으나 무차별파괴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인간죄악을 멸해서 창조본연의 이상을 실현하고, 그 실현이 재림이상에 의해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고, 한국에 태어난 문선명씨를「아버님」이라고부르고있다.
그리고 문선명씨의 이름을 영어로 써서「Sum·M·Moon」이라하여 해와달, 즉 세계를 통일하는 구세주의 이름으로해석하고 있다.
<미국(美國)에 번지는 한국통일교(韓國統一敎)>, 조선일보, 1964년 7월 5일.
기성 교회와 대화를 시도하지만 화해가 가능할 리 없다. 한국에서 종교로서의 입지는 더 어려워진다.
그는 창조론(創造論)에서 인간(人間)은 미완성단계에서 타락함으로써 인간이 신(神)의 창조성으로 물려받은 책임분담을 못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창조목적인 지상천국(地上天国)을 이루기위해서는 인간이 완성(完成)된 개체(個體)로 복귀(復帰)되어야한다.그리고 타락한 인간의 구원을 목적으로 온 예수의 죽음은 따라서 신(神)의 구원목적의 실패를 의미한다.
예수의 재림(再臨)의 필요설은 여기에서 더욱 절실해질 수밖에 없다. 예수의 재림이 가져오는 이 세상의 종말은 이 지상(地上)의 종말이 아니라 지상천국(地上天国)을 이룩하는 것이며 불의 심판이 아니라 말씀(진리(真理))의 심판이된다. 이어서 그는 재림(再臨)하는 예수는 필연적으로 한국에 나타날 것이라고 신구약(新旧約) 성서(聖書)를 인용, 주장한다.
재미있는 것은 선악과(善悪果)를 따먹은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창세기(創世紀))에 대한 해석. 이브를 유혹한 뱀은 타락한 천사이며,타락한 천사(뱀)와 이브 사이의 불륜(不倫)의 관계, 그리고 이브와 아담 사이의 불륜(不倫)의 관계로 풀이하고 있다.
이 음난(淫乱)행위가 원죄(原罪)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원죄(原罪)를 구속(救贖)하려고 온 예수가 그 구원목적을 실패했기 때문에 메시아의 재림(再臨)이 불가피한것이며, 이제 한국은 그 메시아가 나타날 때가 되었다고 말했다.
…
안병무(安炳茂)(중앙신대(中央神大)교수)박사도 성서(聖書)의 부분적인인용은「성경을 비참한희생물」로 만들 뿐이라고 비판했다. 한동세(韓東世)(정신과의(精神科医)·서울의대(医大)교수)박사는 문선명(文鮮明)씨나 유효원(劉孝元)씨 등 통일교회(統一敎会) 지도자의 개인적인 성장환경에 관심을 보였다. 현실에서 좌절이 심하고 반항(反抗)이 강한 사람들의 집단적인 에고(ego)를구하려는 욕구충족과정으로서 종교를 파악했다.
따라서 이성(理性)보다는 정서에 호소하려는 요소—열광주의,비논리성(非論理性)—의제거가 기성,신흥을 망라한 종교가 당면한 문제라고 말한다.
<기성교회(既成敎会) 통일교회(統一敎会) 최초(最初)의 대화(対話)>, 조선일보, 1968년 9월 12일.
종교적 논쟁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던 걸까.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에서 반공이데올로기를 “교리”로 도입한다. 냉전 시기 한국, 일본, 미국의 보수 진영과 궤를 같이 하는 강력한 반공 메시지를 통해 주류 사회에 빠르게 침투하고, 국가의 정계 핵심 인물들과 관계를 맺고 지지 기반을 닦는다.
특히 주목되는것은「공산주의(共産主義)를 이론적으로 승복시킬수있는 원리(原理)」로서제시되는 승공이념(勝共理念)이란바로 통일교회(統一教会)의교리(教理)인「원리(原理)」라는 사실이다.
「한국이 낳은 3대신학서(代神學書)가운데 하나」라고 연대신대학장(延大神大學長) 서남동(徐南同)교수가 격찬한 통일교회(統一教会)의 교리(教理)가운데 특이한 점은 ①예수님께서 한국에 재림(再臨)하고 ②인류세계는 이 재림한 예수를 중심으로 하나의 대가족(大家族) 사회로 통일되며 ③이에 따라 하나님의 구원섭리의 최종목표인 지상천국(地上天国)을 세운다는점이다.
최종목표로 설정된 지상천국(地上天国)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수 없으나 이 목표를 수행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통일교회(統一教会)가 승공(勝共)운동을 들고나섰고, 이것을 의도했든 안했든간에 국가시책과 상응(相応)한다는 점에서 당국의 직접간접적인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사랑은 서로의 욕망이 완벽히 합치될 수 있다는 감상적인 기대를 저버리는 데서 시작된다. 사랑은 완성이 아니라, 인간 주체의 근원적인 결여와 상대의 메울 수 없는 공백이 조우하는 비극적 사건에 가깝다.
조화로운 통일이라는 환상을 걷어낼 때, 비로소 우리는 상대의 결함을 내 정체성의 초석으로 받아들이는 진실의 장소에 도달한다. 사랑의 위대함은 불가능을 극복하여 기적을 만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불가능성 자체를 관계의 유일한 토대로 삼는 용기에 있다.
필연적으로 어긋나고 실망할 것이다. 그러나 그 실패의 반복이야말로 서로를 도구화하지 않고, 타자로서 온전히 마주하고 있다는 유일한 증거이다.1네가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아서 내가 고통스럽고 실망스럽다면, 역설적으로 그것이야말로 내가 지금 나의 환상이 아닌 참된 너를 마주하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인 셈이다. 우리는 다시 기꺼이 실패해야 한다. 사랑은 부서질 것을 알면서도 멈추지 않는 주체의 가장 고결한 결단이기 때문에.
footnote
1
네가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아서 내가 고통스럽고 실망스럽다면, 역설적으로 그것이야말로 내가 지금 나의 환상이 아닌 참된 너를 마주하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인 셈이다.
1940년대 펄프 픽션에서 기본 아이디어를 가져온 셰인 블랙의 영화 <키스 키스 뱅뱅 (2005)>에는 재치 넘치는 대화가 많이 나온다. 주인공 해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하모니(미셸 모너핸)에게 미안하다는 의미로 “I feel badly“라고 하자, 하모니는 ‘badly’ 대신 ‘bad’를 써야 한다며 즉각 교정해 준다.
‘Badly’는 부사야. 그러니까 ‘feel badly’라고 하면 네가 느끼는 기능 자체가 고장났다는 뜻이 되는 거지.
해리는 이렇게 얻은 ‘지식’을 페리(밸 킬머)와 대화하면서 어설프게 써먹으려 한다. 페리가 화를 내며 그만 꺼지라는 의미에서 내뱉은 말에 딴죽을 건다.
페리: 가서 나쁜 꿈이나 꾸고(sleep badly), 질문이 있어도 연락하지 마쇼. 해리: bad 페리: 뭐라고? 해리: ‘Sleep bad’라고 해야죠. 안 그러면 잠을 자는 기능이… 페리: 뭔 개소리야? 문법을 어디서 처배운 거야? badly는 부사라고. 꺼져.
게임 <사이버펑크 2077>에 등장하는 캐릭터 주디 알바레스는 나이트시티 최고의 브레인댄스(Braindance, BD) 기술자이며 목스(Mox)라는 이름의 여성갱단 소속이다. 사이버펑크 세계관에서 브레인댄스란 신체 감각, 감정, 생각을 포함한 인간의 경험을 총체적으로 기록하고 재생하는 기술이다. 브레인댄스는 누군가의 경험을 그대로 재현할 뿐 아니라 당시의 생생한 감각, 희로애락의 감정을 직접 체험할 수 있게 한다. 주디는 BD가 “순수한 형태의 감정”이라고 말한다.
주디는 레즈비언이다. 주인공 캐릭터인 V가 여성일 경우에만 그녀와 친구 이상의 관계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런 과정의 정점에 있는 퀘스트가 <깊이 빠지다>1영어판 퀘스트 제목은 <피라미드 송>이다. 퀘스트의 제목이 라디오헤드의 곡 제목이기도 하고 내용에 있어서도 그 유명한 뮤직비디오를 노골적으로 오마쥬한다.인데, 지연된 즐거움을 주는 소소한 대화 선택지가 있다. 댐 건설로 수몰된 고향 마을로 다이빙해 들어가는 내용의 퀘스트 도입부에서 주디의 다이빙슈트가 잘 어울린다고 칭찬하면 ‘맥스텍 유니폼을 입은 모습을 봐야 하는데‘라고 한다. 그런 것도 있냐고 물으면, 내기에서 땄고 아직 옷장에서 적절한 때를 기다리고 있다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인다.
별 의미없이 주고받은 농담같지만, 한참 후에 주디의 집에 가보면 실제로 맥스텍 유니폼세트를 찾을 수 있다. 물론 다이빙슈트 핏을 칭찬하지 않고 넘어갔다면 맥스텍 유니폼도 없다. 이런 게 CD Projekt RED의 유머감각일 것이다.
주디는 V와 함께 다이빙하는 경험을 브래인댄스로 녹화하고 싶어 한다. 다만 이번에는 두 사람의 뇌가 연결된 채 같이 녹화한다는 점이 다르다. 이런 특수한 설정 때문에 V는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물속에서 주디가 떠올리는 어린 시절 기억을 마치 자신의 기억처럼 감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조부모 슬하에서 자란 주디가 어린 시절 또래들로부터 따돌림받았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주디가 숨겨놓은 인형도 찾게 되는데, 주디가 일방적으로 좋아하던 친구의 인형이었다. 호감이 있지만 그 감정을 인정할 수 없어서 반대로 행동했던 것일까. V는 주디의 회상을 들으면서 생생한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물속의 성당에서는 어린 주디가 울림을 느끼기 위해 냈던 그 소리를 듣는다. 이후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V는 주디의 이미지를, 주디는 V의 이미지를 영원히 소유하게 된다. 육체적인 결합 이전에 감정과 감각의 결합이 우선했다.
또 다른 캐릭터인 팬앰에게도 독특한 연출이 준비되어 있다. 퀘스트라인의 끝부분에서 V와 팬앰은 바실리스크라는 이름의 군사 장비에 몸을 싣는데, 바실리스크에 설비된 감각 피드백 기술 덕택에 둘의 신경계가 하나로 얽힌다. 그로테스크한 조명이 비추는 좁은 조종석에서 두 사람은 상대의 감각을 자신의 것처럼 느끼면서 사랑을 나눈다. 이쯤 되면 “feel badly”라는 문법적 농담에 뼈가 생긴다. 기분에 대한 형용사가 아니라 감각하는 기능을 수식하는 부사가 필요해진다.
BD는 80년대의 상상력에 크게 기대고 있는데, 더글라스 트럼벌의 영화 <브레인스톰>에 등장하는 경험을 기록하고 재생하는 기술, 그리고 윌리엄 깁슨의 소설 <뉴로맨서>에 나오는 simstim(simulated stimulation) 장치가 큰 영향을 미쳤다. 비슷한 시기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도 자신의 잠재의식을 암호화키로 사용하는, 정신분석과 사이버펑크가 매시업된 느낌의 기술이 등장한다는 점도 언급해 두고 싶다.
제임스 캐머런이 각본을 쓰고 캐서린 비글로우가 연출한 1995년 영화 <스트레인지 데이즈>에도 이와 유사한 장비가 등장한다. SQUID라 불리는 이 장치는 로드니 킹 사건과 1992년 LA 폭동의 기억을 불러오는 세기말의 로스앤젤레스를 배경으로, 주로 스너프 디스크를 생산하고 유통하는 데 사용된다. 특히 희생자의 눈을 가린 채 스퀴드를 씌워, 폭행당하는 자신을 가해자의 시점으로 보도록 강제하는 시퀀스는 극도로 끔찍하다. 주인공 레니(레이프 파인스)는 이 디스크를 체험하고 나서 심각한 고통에 시달리는데, 이는 안전한 거리에서 폭력을 관음해 온 관객들을 향한 윤리적 힐난처럼 기능한다. 이 영화에서 스퀴드는 카메라의 극단적인 은유다. 스너프를 생산하는 미디어이면서, 동시에 부조리한 현실을 폭로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리리스가 남긴 기록은 무고한 흑인 셀럽을 살해하는 경찰의 폭력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증거로 작동하며, 영화는 이미지가 범죄의 공범이 될 수도, 진실을 드러내는 증언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사이버펑크 2077>에서 조니(키아누 리브스)는 V에게 아라사카의 미코시가 왜 나쁜지 묻는다. 미코시란 기업이 인간의 인격 구성체와 디지털화된 정신체를 수집해서 보관하는 데이터베이스, ‘영혼의 감옥’을 지칭한다. 게임 상에서 미코시는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영생의 프로젝트로도, 인격을 편집하고 조작하는 기술로도 그려진다. 이렇게 인격의 핵심요소가 디지털화되어 조작의 대상이 되는 세상에서 나의 존재는 무엇이 담보하는가? 데카르트 식으로 사유하자면, 감각은 속일 수 있고, 꿈과 현실을 구별하기 어렵고, 심지어 악마가 모든 믿음을 조작할 수 있다고 가정하면서도 완전히 의심할 수 없는 출발점은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게 의심하고 생각하는 자가 과연 나인가? 나의 사이버웨어에 복사된 다른 누군가의 정신체가 대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이버펑크 세상을 지배하는 기업의 입장에서는 하찮은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자본의 관점에서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인간으로서 노동자는 관심 대상이 아니니까.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노동 자체가 필요한 것이며, 심지어 노동을 제공하는 주체가 인간일 필요도 없다. 조니는 미코시를 테러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사이버펑크식 억압 구조에 균열을 만들려고 한다. 플레이어는 대부분 조니의 의지를 대리 수행하는 길, 미코시를 파괴하려는 싸움을 하게 된다.
푸엔테스의 <아우라>가 떠오른다. 광고를 보고 찾아간 노파 콘수엘로의 고풍스러운 집에서 그녀의 남편 요렌테 장군이 남긴 미완의 기록을 완성하는 일을 진행하게 된 젊은 사학자 펠리페가 주인공이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콘수엘로의 조카인 아우라와 만난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펠리페와 요렌테, 아우라와 콘수엘로의 이미지들이 혼란스럽게 겹친다. 이 몽환적이고 초현실적인 짧은 고딕 소설은 이인칭 시점으로 쓰여있다. 이 독특한 서술방식은 모든 문장을 최면술사의 주문처럼 만들고, 시간과 공간, 이성과 환상, 현실과 꿈, 산 자와 죽은 자 간의 경계를 점진적으로 무너뜨린다. 종국에는 ‘너’로 호명되는 존재가 펠리페인지 요렌테인지 다른 누구인지도 모호하게 된다. ‘너’라는 주어는 ‘나’와는 달리 본래 고정된 정체성이 없는 언제든 다른 대상을 가리킬 수 있는 빈자리가 아니던가.
<아우라>의 이인칭은 그래서 결정적이다. ‘너’는 언제나 호출되지만 결코 고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독자를 가리키기도, 인물을 가리키기도, 이미 죽은 자의 잔향을 가리키기도 한다. 사이버펑크의 세계에서 ‘나’가 데이터로 분해되고 기업의 저장소에 보관될 수 있다면, ‘너’는 오히려 마지막까지 붙잡히지 않는 대명사다. 미코시가 봉인하려는 것은 인격이지만, <아우라>가 끝까지 미끄러뜨리는 것은 정체성이다. 누가 생각하고 있는가, 누가 느끼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주어를 잃는다.
어쩌면 우리는 늘 이렇게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기억을 빌려 사랑하고, 누군가의 언어를 빌려 사과하며, 누군가의 시점으로 세계를 통과한다. 그럼에도 어떤 순간에는—물속의 성당에서 울림을 시험하던 어린아이의 목소리처럼—도저히 대체될 수 없는 감각이 남는다. 그것은 문법으로는 교정할 수 없고, 기술로는 완전히 포획되지 않으며, 이인칭으로 불릴 때 가장 또렷해진다. 결국 남는 것은 선언이 아니라 호명이다. 어느 순간 내 존재를 확신하기 힘든 순간이 올지라도, 누군가에게 불리고, 그 부름에 떨리듯 반응하는 순간만큼은 대체될 수 없다.
footnote
1
영어판 퀘스트 제목은 <피라미드 송>이다. 퀘스트의 제목이 라디오헤드의 곡 제목이기도 하고 내용에 있어서도 그 유명한 뮤직비디오를 노골적으로 오마쥬한다.
흥미로운 베트남 쌀국수의 기원을 찾는 여행 기록. 쌀국수의 기원지로 알려진 곳인 하노이에서 남동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남딘성 반꾸(Vạn Cú) 마을과 하노이를 오가며 취재한다.
“아니, 그건 조금 더 복잡한 얘기예요.” 응우옌이 말해 내게 의외를 안겼다. 나는 또 한 번의 반전이 이어질까 긴장했다. “퍼의 한 형태는 반꾸에서 시작됐지만, 실제로 형태를 갖춘 건 하노이예요. 반꾸 사람들 덕분이죠.” 퍼는 하노이에서 훨씬 더 맑은 국물과 적은 피시소스로 발전했다고 그녀는 말했다. 20세기 초에 많은 반꾸 사람들이 하노이로 이주해 왔고, 부자나 프랑스인들만 먹을 수 있던 소고기 쌀국수를 만들 기회를 보았다고 그녀는 덧붙였다. “오늘날 퍼는 모두의 음식일지 몰라도, 100년 전,” 응우옌은 말했다, “그건 부자들을 위한 요리였어요.”
그 말이 이해됐다. 퍼가 베트남 북부에서 시작됐다는 데에는 모두가 동의하지만, 정확히 어디서 비롯됐는지에 대해서는 영영 합의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퍼는 프랑스와 중국의 영향이 일부 섞이고, 여기에 베트남인의 기지와 자립심이 더해져 탄생한, 베트남의 복잡한 역사를 반영하는 음식이라는 것이다. 남딘 어딘가에서 시작되어 하노이에서 완성되었고, 이제는—그럴 만한 이유가 충분하기에—전 세계가 사랑하는 음식이 되었다.
엣지는 위험을 즐기는 자, 한탕주의자들이 가는 불분명한 곳이야. 엣지에서는 돈, 명성, 심지어 목숨까지 원칙이나 한탕만큼이나 모호한 것에 걸지. 사이버펑크로서 넌 행동 그 자체가 되길 원해. 반란을 일으키고, 불을 붙이고, 거대한 대의에 뛰어들고, 큰 문제를 위해 싸워. 빠르게 달릴 수 있는데 천천히 갈 이유가 없지. 위험을 정면으로 맞서고 피하지 않아. 너무 안전하게 놀지 마. 엣지에 헌신하는 거야.
영화 <Blade Runner>의 제목은 사실 윌리엄 S. 버로스의 단편 <Blade Runner: A Movie>에서 따온 건데, 그것 역시 또 다른 소설 앨런 E. 노어스의 <The Bladerunner>에서 가져왔다. 수술용 칼 따위의 불법 의료 장비를 운반하는 밀수꾼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니 말 그대로 “칼을 들고 달리는 사람”이었던 것. 하지만 리들리 스콧은 의미와는 상관없이 강렬하고 미래적인 느낌 때문에 이 제목을 차용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엉뚱하지만 탁월한 선택이었다. 칼날, 혹은 경계 위를 달리는 자 등으로 해석되면서 사이버펑크의 고전에 안성맞춤인 의미를 얻게 되었으니까.
지금까지 인류를 실망시킨 적 없는 CD Projekt RED의 <Cyberpunk 2077>을 최근 다시 플레이했는데 과도하게 몰입한 나머지 후유증을 앓고 있다.
복도훈은 ⟪유머의 비평⟫에서 서효인의 시집 ⟪여수⟫에 수록된 몇 편의 시에 가해진 자기검열1이윤주, “내 문학 작품 속 여혐 수정” 새 풍경, 한국일보, 2017.02.23.이 크게 신경 쓰이지는 않았지만, 시집을 읽고 나서는 수정 이전과 이후의 표현을 비교해 볼 수밖에 없었다고 밝힌다.
그러나 시인의 말을 빌리면 “온갖 곳에 염결성과 예민함을 드러내면서 하필 방종했던” 방식으로 자신의 시에 드러나게 된 여성 혐오적인 표현을 삭제하거나 수정한 부분이 막상 내가 『여수』를 읽을 때는 크게 신경이 쓰이지는 않았다.2복도훈, ⟪유머의 비평⟫, 도서출판b, 40.
시인이 언론에 밝힌 바에 의하면, 시 〈서귀포〉에서 ‘궁둥이’를 ‘몸 어딘가’로 바꾸었고, 또 다른 시에서는 ‘여공’을 ‘젊은이’로, ‘아줌마’를 ‘학부모’로 바꾸었다.3이윤주의 같은 기사, “최근 세 번째 시집 ‘여수’를 출간한 서효인 시인은 작품에서 ‘여성혐오’가 엿보이는 시어를 고치거나 다시 썼다. 시 ‘구미’에서 ‘공장에 다니는 여공들’을 ‘공장에 다니는 젊은이들’로, 시 ‘마산’에서 ‘우리가 모두 아줌마가 되면’을 ‘우리가 모두 학부모가 되면’으로 바꾸는 식이다. 시 ‘서귀포’에서 제주 4ㆍ3항쟁을 회상하는 표현은 발표 당시 ‘젊은 남자는 섬 말 쓰는 아녀자를 잡아서 궁둥이 사이에 대검을 꽂아 넣었다’로 썼지만, 이번 시집을 묶으며 ‘미아들은 섬 말 쓰는 사람들을 잡아다 몸 어딘가에 대검을 꽂아 넣었다’로 바꿨다.” 의미는 알겠는데, 과연 시인이 수정한 표현이 이전의 작품보다 현재의 작품을 더 낫게 만들었을까?
자극적인 표현을 덜 자극적인 표현으로 바꾼다고 폭력이 줄어들 것으로 믿는 것은 ‘민간인 살상’을 ‘부수적 피해’로 바꿔 부른다고 민간인 살상이 줄어든다고 간주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정치적 올바름’의 언어검열이나 완곡어법은 언어의 해방이 아니라 언어의 감옥이 될 공산이 농후하다. 그것은 정신분석적 의미에서 무의식적인 억압-검열보다는 상처와 폭력에 대한 체계적인 ‘부인verneinung’에 가깝다. 그것은 단지 덜 자극적이고 덜 불쾌한 표현의 규칙과 예시를 만들고 그 규칙에 자신의 이름을 서명해 넣는 일을 선호할 뿐이다.4복도훈의 같은 책, 43.
히스테리 환자는 거짓말의 형태로 진실을 말한다. 그가 말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사실이 아니지만, 거짓말은 거짓된 형태로 진정한 불만을 표현한다. 반면 강박증 환자의 진술은 문자 그대로 사실이지만, 그 진실은 거짓말을 위한 진실이다. 슬라보예 지젝은 종종 히스테리를 포퓰리즘에, 강박증을 정치적 올바름에 빗댄다. 포퓰리즘은 거짓말의 형태로 진실을 말한다.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거나 해결이 불가능한 방식으로 문제를 다루면서도, 그 거짓이 실제로 존재하는 분노와 불만을 건드린다. 반면 정치적 올바름은 진실로 거짓말을 한다. 차별과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 언어를 바꾸고 상징적 질서에 규칙을 추가하지만, 정작 사회경제적인 수준에서 근본적인 차별, 불평등은 해결되지 않는다. 지젝은 정치적 올바름을 대리수동성으로 묘사한다.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나거나 실질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행동한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바꿔 나가자. 그래야 전체적으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수 있다!”5슬라보예 지젝, “Repeating Lenin“, lacan.com 복도훈도 유사한 의미의 다른 문장을 인용하고 있다. “그것은 문제를 살아있게 하기 위해서 자꾸만 새로운 답을 내놓는다.”6슬라보예 지젝,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411.
이런 강박은 정치적인 지형 안에서 고압적으로 표출된다. 지젝은 자유주의 엘리트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정치적 무지와 혼란, 맹목을 꾸짖고 모욕하는 것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그들을 고압적으로(patronizingly) ‘이해’한다고 비판했다.7슬라보예 지젝, 앞의 글. 강준만은 “나는 기본적으로 PC 운동의 취지와 당위성엔 동의와 지지를 보내면서도 동의와 지지를 보낼 뜻이 있는 사람들까지 등을 돌리게 만드는 운동방식의 문제엔 비판적인 입장”이라고 밝힌바 있다. “PC운동이 애초에 인간에 대한 예의에서 출발한 것임에도 어떤 사람들이 그 예의를 지키지 않거나 소홀히 대한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너무 거친 비판을 퍼부음으로써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는 건 모순”이라고 했다.8강준만, ⟪정치적 올바름⟫, 인물과사상사, 30.
작가와 작품의 분리라는 주제에서도 유사한 강박을 본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수십 년 동안 노벨문학상 후보 명단에 올랐으나 끝내 수상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9노벨문학상은 종종 납득하기 힘든 이상한 선택들을 하는데, 정치인인 윈스턴 처칠, 포크싱어인 밥 딜런에게 상을 준 일도 그렇지만, 20세기 초부터 내내 이어져 온 어떤 정치적 강박이 작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종종 받게된다. 그가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에게 훈장을 받았기 때문에 노벨문학상에서 멀어졌다고 보는 의견이 많은 것 같다. 그를 심지어 반공주의자라고도 얘기하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정치에 소극적인 보수주의자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그는 유전적으로 시력이 좋지 않았다. 아버지와 할머니도 일찍이 시력을 잃었고, 본인도 국립도서관장에 취임한 5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눈이 멀기 시작했다. 이후 30년 이상을 어둠 속에서 살았다. 그는 그가 자주 묘사한 이미지처럼 중심이 없는 미로 속을 더듬으며 “부유하듯” 살았으며, 누군가 대신 읽어줘야 하는 책으로 가득한 도서관이 그의 세계였다. 세상은 수수께끼였고 그는 그 점을 경이롭고 다행스럽게 여겼다. 그에게 정치적이기를 요구할 수 있을까? 아무리 그래도 피노체트에게 훈장을 받다니 심하긴 했다. 하지만 그러한 결함을 그의 실존적 맥락이나 그가 평생 추구해 온 문학적 맥락을 무시한 채, 그저 그의 윤리적인 결함으로 단정할 수 있는 걸까?
마침 프랑스의 사회학자 지젤 사피로가 쓴 흥미로운 제목의 책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를 소개하는 한겨레 기사가 맥빠지지만 불가피해 보이는 결론을 요약하고 있다.
그렇다면, 작가와 작품은 분리할 수 있는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자칫 허탈하게 들릴 수도 있는 결론이지만, 이 질문에 대해서는 결코 단순하고 결정론적인 답변이 가능하지 않으며, 사안에 따라 꼼꼼하고 합리적인 논의가 필요하다는 취지로 받아들여진다.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재적 분석과 외재적 분석이 모두 필요하고, 문제가 있는 작품이라 하더라도 검열이나 ‘삭제’보다는 경고 문구를 활용하는 게 바람직하다. 출판사 팬 맥밀란이 마거릿 미첼의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2023년에 재발간하면서 이 책이 ‘인종 차별적’이고 ‘유해하다’고 밝힌 것이 참조할 만한 사례다.
이윤주의 같은 기사, “최근 세 번째 시집 ‘여수’를 출간한 서효인 시인은 작품에서 ‘여성혐오’가 엿보이는 시어를 고치거나 다시 썼다. 시 ‘구미’에서 ‘공장에 다니는 여공들’을 ‘공장에 다니는 젊은이들’로, 시 ‘마산’에서 ‘우리가 모두 아줌마가 되면’을 ‘우리가 모두 학부모가 되면’으로 바꾸는 식이다. 시 ‘서귀포’에서 제주 4ㆍ3항쟁을 회상하는 표현은 발표 당시 ‘젊은 남자는 섬 말 쓰는 아녀자를 잡아서 궁둥이 사이에 대검을 꽂아 넣었다’로 썼지만, 이번 시집을 묶으며 ‘미아들은 섬 말 쓰는 사람들을 잡아다 몸 어딘가에 대검을 꽂아 넣었다’로 바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