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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itics

당연함에 대한 거부

스스로를 프로테스탄트라고 부르며 하루라도 글을 쓰거나 읽지 않으면 죄책감 때문에 잠들지 못한다고 고백하는 지독한 워커홀릭 철학자의 인터뷰. 진짜 이렇게 아무렇게 주워 입고 나와도 되는 건가 싶은 옷차림, 에둘러 말하는 법 없는 거침 없는 화법은 그의 캐릭터를 그대로 보여준다. 어느새 부쩍 늙어버린 철학자에 의하면, 철학의 임무는 세상에 정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 자체가 어떻게 문제의 일부가 되는지 폭로하는 것.

민감한 주제들에 대한 그의 급진적 태도는 여전히 점잖은 리버럴 지식인들이 그의 팬이 되기 힘들게 만든다. 이를테면, 오늘날 PC 담론이 상류 중산층의 전유물이 되어 실제 노동계급 여성들이 겪는 일상의 물적 고통을 소외시키고 있다는 일갈. 해시태그 미투 운동이 화려한 셀러브리티 사회의 권력관계에 집중할 때, 생계 때문에 불행한 결혼 생활이나 부당한 노동 조건을 견뎌야 하는 평범한 여성들의 진짜 공포는 가려진다는 주장. 젠더 정체성을 지시하는 대명사를 고르는 세련된 고민보다, (포퓰리즘을 옹호한다는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일상의 구체적인 권익을 보장하는 투박한 실천이 더 중요하다는 주장 등. 그의 목소리는 불온하지만 선명하다. 특유의 저속하고도 명쾌한 농담도 빠지지 않는다.

오늘날 가장 이상적인 섹스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한 여성과 제가 데이트한다고 가정해 보죠. 우리는 동의하에 섹스하기로 했어요. 실제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상대는 ‘플라스틱 전동 딜도’를 가지고 오고, 저는 ‘플라스틱 질’을 가지고 옵니다. 우리는 마주 앉죠. 상대의 기구를 제 기구에 연결합니다. 기계들이 서로 연결되어 윙윙거리며 섹스를 수행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무엇을 할까요? 편안하게 앉아서 차를 마시며 멋진 대화를 나누죠. 아, 정말 좋네요! 기계가 우리 대신 섹스를 해주고 있어요!

현대 사회의 상호수동성(Interpassivity)을 말하는 수만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이런 저속한 농담으로는 지젝보다 잘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농담 속의 황당한 풍경은 확장된다. AI가 대신 써주는 논문, 알고리즘이 대신 골라주는 취향, 기계가 대신 수행하는 욕망 속에서 정작 주체인 인간은 밀려나 있다. 그는 뉴럴링크와 같은 기술이 우리의 뇌마저 디지털 네트워크에 직접 연결하려 할 때, 인간이 지닌 마지막 보루인 내면적 자유마저 붕괴될 것임을 경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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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Quote Review

사랑, 소명

슬라보예 지젝은 최신 에세이1The Double Life of Veronique: The forced choice of freedom에서 소명(vocation)과 평온한 삶 사이의 윤리적 선택에 관하여 논한다.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을 경유하는 분석이 매우 흥미로운데, 사랑과 소명에 관한 언급을 인용해 두고 싶었다. 지젝에게 사랑이란 일종의 ‘악’이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순간 그 사람은 나에게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한 절대적 존재가 되며, 평온한 우주의 질서에 구멍을 낸다. 사랑 그 자체를 유일한 소명으로 삼으면, <폭풍의 언덕>의 히스클리프처럼 파괴적인 집착과 복수심에 사로잡히게 되어 연인과 자신 모두의 세계를 파멸로 이끌게 된다. 사랑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서는 대의(Cause)라는 버팀목이 요구된다. 진정한 사랑은 대의를 위해 사랑을 버림으로써 이룰 수 있다.

그렇다면 만약 내가 격렬히 사랑에 빠져 있으면서 동시에 어떤 (과학적, 정치적, 예술적) 대의(Cause)에 절대적으로 헌신하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장 최악은 대의에 대한 헌신을 희생하고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 경우, 나는 사랑 자체마저 잃게 될 것이다. 상대방에게 나약한 존재로 비칠 것이고, 결국 연인으로부터 버림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사랑의 궁극적 시험은 연인이 나를 버리더라도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음을 내 연인에게 증명하는 것이다. 오직 그 경우에만 나는 사랑받을 자격을 얻게 된다. 유일하게 진정한 결정은 사랑을 포기하고 대의에 우선순위를 두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내가 감당하기에 너무 벅찬 일로 판명된다면, 나는 자살을 택할 뿐이다. 여기에는 타협의 여지도 없고, 제3의 길도 없다.2같은 글

footn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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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C Politics

예언

요즘 뉴스를 훑다 보면 다른 건 몰라도 윤석열 당선인이 청와대라는 ‘공간’에 가진 강한 거부감만큼은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 그 거부감은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는 모호한 아포리즘으로 설명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다. 때문에, 막연히 구전되며 유통되고 있는 가설, 그러니까 그가 어떤 무속인에게서 청와대와 관련한 불길한 신탁을 받았다는 소문을 그저 농담으로 흘려보내기 힘들어지는 것이다.

지젝은 라캉의 “진리는 오직 오인을 통해서만 나타난다”는 명제를 설명하면서 윌리암 텐의 SF소설과 서머싯 몸의 희곡 <쉐피>의 한 단락과 함께 오이디푸스 신화를 예로 든다.

다시 말해서 예언은 그것이 영향을 미치는 사람에게 전달되어 그가 그것을 피하려고 함으로써만 진리가 된다. 우리는 자신의 운명을 미리 알게 되고 그것을 피하려고 한다. 그런데 예정된 운명이 실현되는 것은 바로 그러한 도망침을 통해서다. 예언이 없었다면 어린 오이디푸스는 자기 부모와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잘 살았을 것이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란 것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109p.

뭔가 고전적인 비극이 하나 만들어질 것도 같고…

[추가] 재발견한 작년의 에피소드 하나: 유승민 측 “윤석열 대뜸 ‘정법 유튜브 보라’며 손가락질” (한경, 2021.10.06. 고은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