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기간 중 집걱정끝장넷에서 발표한 기획 보도자료.
인색한 하늘 야속하여 틈틈히 수돗물을 뿌렸더니 어느새 하얀 꽃이 피어났다. 치자꽃을 볼 때마다 그 단순명료한 구조와 색상 때문에 어딘지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강렬하게 마음을 사로잡는 향기를 맡아보면 쥐스킨트의 쟝 그르누이가 궁극의 향수를 몸에 쏟자 파리의 빈민들이 달려들어 뜯어먹는 그 결말이 쉽게 납득이 되는 것이다. 치자꽃 향기는 확실히 어떤 소유욕을 자극하는 면이 있다.
빌리 홀리데이의 치자나무꽃1사실은 개량된 원예품종인 꽃치자 머리장식 시그니처도 유명하다. 머리를 손질하다가 왼쪽 옆머리를 태워먹고 이를 가리기 위한 임기응변이었다고 한다. 반응이 좋자 이후로도 꾸준히 애용했다는 것이다.2참고: https://www.vogue.com/article/billie-holiday-gardenia-flower-hair-history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흑인 최초 아카데미 조연상을 받은 해티 맥데니얼이 시상식에서 치자꽃으로 장식했다고 하는데 우연인지 어떤 다른 맥락이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검은 머리에 장식한 하얀 꽃은 단순한 장식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걸까?
footnote
- 1사실은 개량된 원예품종인 꽃치자
- 2참고: https://www.vogue.com/article/billie-holiday-gardenia-flower-hair-history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는 너무나도 양식화되어 있고 지방선거는 더욱 더 그러해서 스스로를 우파라 칭하는 자들도 좌파라는 자들도, 극우 파시스트들도, 운동권 출신이라는 진보 어쩌고 후보도 번호와 색깔만 다를 뿐 똑같은 뽕짝메들리를 틀어대며 돌아다닌다. 선관위는 유세차량에서부터 선거과정의 세세한 요소들을 규격화하는 방식으로 제도를 다듬었고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이제 감도 안 잡힌다. 그냥 선거란 그런 것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암울한 생각만 든다. 색깔과 번호 외에는 도무지 구별되지 않는 그렇고 그런 사람들이 노래하고 춤추고 욕하고 떠들다가 꾸벅 절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으니 누구라도 찍어야 세상이 바뀔 거라고 말하는 게 최선일 리는 없다. 답답하다.
하지만 잡초들에겐 적어도 하나의 공통된 행동 양식이 있다. 그들은 인간과 함께 번성한다는 것이다. 잡초는 기생식물이 아니다. 그들은 인간이 없어도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우리 곁에서 유독 번성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자연계에서 그들의 생태적 협력자다. 잡초는 우리가 땅에서 하는 일을 좋아한다. 숲을 청소하고, 땅을 파고, 농사를 짓고, 영양분이 풍부한 쓰레기를 버리는 것 말이다.
<< 처음 읽는 식물의 세계사>>, 리처드 메이비. 29p.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윤석열 정부의 노동시간 유연화 정책과 관련해 “생산직은 (사무직과 달리) 주 52시간 이상 일하지 못하게 된 것에 대한 반발이 있다”며 주 52시간 상한제 적용 대상에서 배제할 수 있다는 태도를 밝혔다.
한겨레, 5월 17일, <이준석 “생산직, 주 52시간 이상 원해”…노동계 “임금구조 왜곡 간과”>
52시간 이상 일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임금이 낮으니 잔업하고 특근하는 거지. 32시간 정도 일하게 하고 52시간 이상의 돈을 주는 게 바람직한 해결책.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자매지로 창간된 <크리티크M>를 들추니 이른바 NFT 아트에 관한 칼럼이 눈길을 끈다. NFT 어쩌고 하는 수 많은 비전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는 차에 호크니가 NFT 아트 투자에 앞장 선 사람들을 “국제적인 사기꾼”이라고 단정짓는 대목을 만나니 반갑기도 했다. 그러니까, 여러 장의 사진을 짜깁기한 300메가바이트의 JPG 파일에 블록체인 기술을 적용해서 수백억 원에 팔았다는 건데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위화감이 사라지지 않는다.
NFT 아트가 그저 이미지 파일이 아니라 예술작품으로 평가받으려면 오프라인 공간과 확연히 변별되는 의미를 창출해야 한다고 말한다.
단순히 오프라인 세계를 모방하는 시뮬라크르(Simulacre)에 그치지 않고, 그 자체로 의미와 진실을 추구함으로써 이전에 없던 세계를 창조해야 한다. 물론 그에 따르는 디지털 문해력, 틈새에서 발견될 또 다른 불평등도 대비해야 할 테다.
<<크리티크M>> 창간호, <비대면 시대>, 예술의 새로운 시도, 김지연, 25p.
코인의 거래시장은 현실 주식시장의 퇴폐적 측면을 일차적으로 모방하는 시뮬라크르인 것 같다. 최근 발생한 루나-테라 코인 사태는 그 모방된 욕망의 파국을 암시하는 게 아닐까. 그리고 해당 글과 멀리 떨어진 다른 글에서 어떤 통찰을 얻은 기분이 드는 건 착각일까.
오늘날 영화 예술은 조직적으로 평가 절하되고, 소외되고, 비하되면서 ‘콘텐츠’라는 최소한의 공통분모로 축소되고 있다. 15년 전만 해도 ‘콘텐츠’는 영화에 대한 진지한 대화를 나눌 때나 들을 수 있는 단어였으며, ‘형식’과 대비되고 비교되는 의미로만 쓰였다. 그런데 그 뒤로 예술형식의 역사에 대해 전혀 모르고, 심지어 알려고 하지도 않는 이들이 미디어 회사를 인수하면서 점차 ‘콘텐츠’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했다.
<<크리크M>> 창간호, <펠리니와 함께 시네마의 마법이 사라지다>, 마틴 스코세이지, 177p.
말하고 싶지 않은 것
당신네 사람들이 얘기하기를 꺼리는 주제가 무엇이냐는 레딧의 어떤 질문에 올라온 댓글 하나.
I live in Japan for 3 years and have some Japanese friends. Everytime I asked them about WW2, they mostly did not know the atrocities that Japan did in WW2. They knew Japan was in the wrong side, but it seems the details were lost. It seems like there is a national effort to forget this history because it was “shameful”.
한국노총을 통해 매달 100여 명씩 탈퇴서가 들어왔습니다. ‘돈을 줍니다. 민주노총 탈퇴서 받아가면 돈을 줍니다. 민주노총 조합원 0%로 만드는 게 목적이다. 회의 때마다 민주노총 조합원 명단을 화면에 띄워놓고 탈퇴율을 체크를 합니다. 업무 하지 말고 민주노총 조합원 매장만 찾아다녀서 탈퇴서를 받으라 합니다.
화섬식품노조 파리바게뜨지회장 임종린, <단식투쟁에 들어가며>
이런 나라가 ILO 사무총장 자리를 탐하다니 너무 후안무치한 거 아니냐.
파시즘은 각자의 성이 자연적 특징을 드러냈던 황금시대를 돌이켜 보면서, 이런 자연적 특성을 포기하는 행위를 근대적 타락과 민족적 쇠퇴의 핵심으로 보았다. 남녀의 정당한 지위가 무너졌기 때문에 남녀 사이에 갈등이 생겨난다. 히틀러에 따르면, “남녀 각자가 자연이 부여한 임무를 충실히 지키는 한, 남녀간 갈등은… 불가능하다.” 모든 반동적 정치와 마찬가지로, 파시즘은 여성의 본질적인 직무는 자녀의 생산이며, 가족 단위 안에 위치해야만 비로소 편안해진다고 생각했다. 파시즘에 있어서 생물학은 진정한 운명이었다. 남성이 전쟁을 하도록 운명지어졌다면, 여성의 운명은 모성이었다. “전쟁이 남자의 것이라면, 어머니다움은 여자의 것이다.”
마크 네오클레우스, 『파시즘』, 이후, p.177.
나치 정권의 핵심 인물이었던 괴벨스는 “여성에게 가장 적합한 장소는 가족이며, 가장 중요한 의무는 국가와 민족에게 아이를 선물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 더 이상 여성 해방의 이름 아래 여성들의 고유한 임무를 등한시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유정희 (2001). 파시즘 국가와 여성. 페미니즘 연구, (1), 115-146.
요즘 뉴스를 훑다 보면 다른 건 몰라도 윤석열 당선인이 청와대라는 ‘공간’에 가진 강한 거부감만큼은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 그 거부감은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는 모호한 아포리즘으로 설명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다. 때문에, 막연히 구전되며 유통되고 있는 가설, 그러니까 그가 어떤 무속인에게서 청와대와 관련한 불길한 신탁을 받았다는 소문을 그저 농담으로 흘려보내기 힘들어지는 것이다.
지젝은 라캉의 “진리는 오직 오인을 통해서만 나타난다”는 명제를 설명하면서 윌리암 텐의 SF소설과 서머싯 몸의 희곡 <쉐피>의 한 단락과 함께 오이디푸스 신화를 예로 든다.
다시 말해서 예언은 그것이 영향을 미치는 사람에게 전달되어 그가 그것을 피하려고 함으로써만 진리가 된다. 우리는 자신의 운명을 미리 알게 되고 그것을 피하려고 한다. 그런데 예정된 운명이 실현되는 것은 바로 그러한 도망침을 통해서다. 예언이 없었다면 어린 오이디푸스는 자기 부모와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잘 살았을 것이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란 것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109p.
뭔가 고전적인 비극이 하나 만들어질 것도 같고…
[추가] 재발견한 작년의 에피소드 하나: 유승민 측 “윤석열 대뜸 ‘정법 유튜브 보라’며 손가락질” (한경, 2021.10.06. 고은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