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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기

끝없이 과거의 기억을 되짚는다. 그때 그러지 말아야 했는데, 왜 그랬을까, 아무리 상황이 여의치 않았어도 이렇게 했어야만 했는데. 꼬리에 꼬리를 무는 후회가 마음을 헤집는다.

바둑에서는 승패가 결정된 후에도 마주 앉아 승부처의 선택을 복기한다. 뒤늦게 발견한 패착을 아쉬워하며, 다른 수를 두었더라면 펼쳐졌을 또 다른 국면을 가늠해 본다. 패배를 기어이 직면하는 이유는 승부의 세계에는 다음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의 승자는 내일 패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오늘의 패자는 내일 승리를 거두기 위해 지난 선택을 되돌아본다.

삶에도 다음이 존재할까? 타임루프물이 주는 쾌감은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영원히 반복되는 성촉절의 굴레 속에서 선택을 바꿔가며 정답을 찾아 나간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성숙해지고, 겸손을 배우며, 끝내 사랑을 쟁취하거나 작은 혁명을 완수한다. 무한한 절망 속에서 헤어 나올 수 없음을 깨닫게 되는 호러 문법도 있겠으나…

만약 내 삶에도 그런 ‘다음’이 주어진다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삶에 복기는 있어도 재경기는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나온 길을 낱낱이 훑으며 아파하는 이 지독한 후회야말로, 깜깜한 내일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그래서 무의미할지도 모르는, 준비 아니겠나. 삶에 정답 따위가 있을 리 없고, 그저 약간이라도 다른 내일을 살아가기 위해 몸부림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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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문현답

바둑 세계 대회 시작 이래 볼 수 없었던 성 대결을 성사시킨 최정 9단은 중앙일보에 여성 바둑 기사로서의 한계를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여자가 남자보다 왜 바둑을 못 둘까’라는 질문을 정말 많이 들었다. 그 이유를 계속 찾았는데 찾기 시작하면 끝이 없었다. 이유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라면서도 “그 이유를 계속 찾을수록 무의식적으로 사회적 편견을 갖게 되고, 내가 원하는 곳에 닿을 가능성이 점점 낮아진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그 이유를 찾기보다 내가 원하는 목표에 집중하려고 한다”라고 말했어요.

허스트중앙 엘르, <바둑 역사상 최초! 세게 메이저 준우승한 여성 기사 최정 9단이 맞서온 편견>, 2022. 11. 11.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던져오던 어려운 응수타진에 가장 완벽한 정수를 찾아 착수한 최정 선수. 정말 이 선수의 헤아리기 어려운 그 깊이에 매번 감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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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 9단

바둑실력뿐 아니라 인품도 너무나 훌륭하다. 삼성화재배 결승이 끝나고 이뤄진 기자회견 분위기는 승리한 신진서보다 패배한 최정에게 더 큰 관심이 쏟아지는 느낌이었다. 한 분야에서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으면서도 그저 그뿐인 사람도 있는데 최정 9단처럼 다방면에서 완성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도 있다. 이 선수가 앞으로도 계속 좋은 성적 거두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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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단상

어제 치뤄진 2022년 삼성화재배 4강전. 최정 9단이 국내 랭킹 2위이자 상대 전적에서 0:5로 밀리고 있던 변상일 9단을 상대로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지금까지 여성 기사가 세계 대회에서 거둔 최고의 성적은 국내 국수 타이틀을 보유자이기도 했던 루이나이웨이(芮迺伟)가 거둔 응씨배 4강이다. 최정 선수는 남녀 통합 메이저 세계 대회의 결승에 오르는 최초의 여성 기사가 되었다.

최정 9단과 변상일 9단 기보 이미지

81, 93번과 같은 수들은 프로 해설자들과 AI조차 놀라게 만든 과감한 수였다. 당장 실리를 손해 보는 수이기 때문이다. 81번 수가 실리를 포기하더라도 공격으로 전단을 열어가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수라면, 93번 수는 최정 선수의 깊은 수읽기 능력을 보여주는 묘수이다.

변상일 9단은 별다른 고민 없이 94로 막았다가 95번 수를 맞고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스스로의 뺨을 세게 때리고 눈물을 훔치며 울기도 했다. 옆자리에 앉아서 대국을 하고 있는 최정 9단은 크게 내색하지 않았지만 매우 마음이 불편했을 것이다. 바둑이 끝나고 뛰쳐나가는 변상일 선수의 뒷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나서야 비로소 활짝 웃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다. 코로나 시대로 규칙이 바뀌어 세계 대회의 경우 보통 온라인 대국으로 치뤄지는데 국내 선수끼리 대국하는 경우에는 같은 방에 나란히 앉아 두게 되므로 나의 행동이 상대방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날 프로 선수들에게는 이기고 지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겠지만 바둑이 그 이상의 무엇이라고 여겼던 시절을 기억하는 입장에서 보면 쓸쓸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대부분의 기사들은 패배가 고통스럽더라도 상대 선수에 대한 예의와 품위를 지키려고 노력한다. ‘중요한 승부에서 패하고도 마음이 아무렇지 않다면 그것은 이미 프로가 아니다’라고 했던 이창호 9단도 이기나 지나 크게 동요하지 않는 모습으로 유명했다. 그런 그의 면모는 성적과는 별개의 어떤 경지를 느끼게 했고 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그를 바둑의 신으로 존경하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짤: "바둑 ㅇ같이 두네"
이세돌9단이 알파고를 상대로 1승을 거두는 대사건 후 네티즌 사이에 유행하던 합성이미지.

AI가 인간의 바둑을 이기면서 그동안 여러가지 의미를 가지던 바둑이 단 한 가지의 의미로 바뀌어 가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