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에서 오래된 시집만 골라서 재단 후 스캔하는 작업을 했다. 임화 시선집의 속표지에서 잊고 있던 메시지를 발견했다. 그래, 책을 선물 받던 날, 심장에도 뼈가 있고 슬픔을 참으면 그 뼈에 핏줄 같은 균열이 퍼지기도 한다는 걸 느꼈지. 한 해 후, 나도 다른 누군가에게 황망한 헤어짐을 선사했다. 보잘것없는 존재를 지탱하고 있던 세상의 모든 것이 끝도 없는 나락으로 무너져버리던 시절, 썩은 동아줄일지언정 카프 시인들, 임화, 그리고 김윤식의 <임화 연구>를 붙잡았던 거다. 누군가는 다시 일어나지 못한 채 죽어가도, 금 간 뼈를 심장에서 들어내고, 죽어간 동지의 시신을 뜯어 먹으며 살아 남는 자도 있는 거지. 삶이란 게 그렇잖아. 하지만, 화로가 깨어지고 화젓갈도 버렸으니 남은 겨울이 따뜻할 리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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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 한 쌍이 눈밭을 헤집네,
디디에 에리봉, 『미셸 푸코, 1926~1984』, 그린비, 109p.
신방 차린 토굴가를 쿵쿵 밟으며,
밤이면 그 억센 사랑이 주위에
타는 목마름을 핏자국처럼 뿌리네.
이 시의 제목은 원래 「웅덩이에 고인 희미한 빛」이며 미셸 푸코가 죽기 나흘 전인 1984년 6월 21일에 르네 샤르가 썼다고 한다. 샤르는 푸코의 죽음을 슬퍼하는 폴 벤느에게 이 시를 선물한다. 벤느는 “그때 우리들은 푸코를 ‘푹스'(여우)라고 불렀죠”라며 감동했다고 한다. 시는 푸코의 장례식에서 낭송된다.
푸코는 르네 샤르의 시를 애정했고 여러 저작에 그 흔적을 남겼지만 현실에서는 아무런 교류를 맺지 못했다고 한다. 샤르 역시 푸코를 매우 존경했다고 한다.
벌써 형성되기 시작한 전설과는 달리 샤르와 푸코 사이에는 이처럼 사후의 묘한 인연밖에는 없다. “그 전설이 사실이라면 재미있겠지만 그러나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좀더 정직한 일이 될 것이다”라고 폴 벤느는 르네 샤르에 관한 글 속에서 말했다.
같은 책. 109p.
서로를 가슴 깊이 존경했으면서도 직접 만나지는 못했던 위대한 두 지성 이야기가 몹시도 매혹적이다. 철학자는 자신의 저작에 시인의 싯구를 새겨넣었고 시인은 철학자의 무덤에 시를 바친다. 눈밭에 타는 목마름을 핏자국처럼 뿌리는 억센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