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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절

오래된 임화 시집 속표지에 적힌 메시지

책장에서 오래된 시집만 골라서 재단 후 스캔하는 작업을 했다. 임화 시선집의 속표지에서 잊고 있던 메시지를 발견했다. 그래, 책을 선물 받던 날, 심장에도 뼈가 있고 슬픔을 참으면 그 뼈에 핏줄 같은 균열이 퍼지기도 한다는 걸 느꼈지. 한 해 후, 나도 다른 누군가에게 황망한 헤어짐을 선사했다. 보잘것없는 존재를 지탱하고 있던 세상의 모든 것이 끝도 없는 나락으로 무너져버리던 시절, 썩은 동아줄일지언정 카프 시인들, 임화, 그리고 김윤식의 <임화 연구>를 붙잡았던 거다. 누군가는 다시 일어나지 못한 채 죽어가도, 금 간 뼈를 심장에서 들어내고, 죽어간 동지의 시신을 뜯어 먹으며 살아 남는 자도 있는 거지. 삶이란 게 그렇잖아. 하지만, 화로가 깨어지고 화젓갈도 버렸으니 남은 겨울이 따뜻할 리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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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log Music

꿈, 불안, 죽음

핑크 플로이드의 <Julia Dream>.

핑크 플로이드의 멤버들은 대부분 중산층 이상의 배경을 지녔지만, 로저 워터스의 경우 조금 결이 다르다. 그의 아버지는 교사였으며 공산주의자였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기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보긴 어렵지만, 그런 가부장이 만든 가정의 분위기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훗날 그의 곡에 스며든 반전과 사회 비판적 메시지의 근원을 탐색해본다면, 이 배경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사이키델릭이 지배하던 시대, 음악에 모든 것을 건 불온한 젊은이가 써 내려갔을 법한 곡이 바로 이 곡이다. 꿈속을 부유하듯 이어지는 모호한 상징들, 종잡을 수 없는 흐름 속에서도 마디를 이루는 시적인 가사. 어쿠스틱 기타의 리듬 위로 멜로트론이 뿜어내는 몽환적 음색의 선율이 데이비드 길모어의 차분한 보컬과 코러스를 이루다가, 끝내 불안과 죽음의 그림자에 잠식되듯 (혹은 저항하듯), 신경질적이고 불길한 노이즈 속으로 해체 (혹은 지양) 된다.

<The Dark Side of the Moon> 이후의 핑크 플로이드에 익숙한 나에게 이전의 앨범들은 완전히 색다른 즐거움을 준다. 빽판을 구하거나 알음알음 테이프를 복사해서 찾아 듣던 시절에는 꿈도 못 꿨던 호사가 지금은 가능하다. 그래서 어느덧 음악은 듣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것이 되었다. 음악을 감상한다는 게 하나의 의식이자 체험이던 시대는 가버렸지만, 가끔은 한가하게 음악에 집중하는 시간을 가져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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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log ETC

어린 왕자

기억 속 첫 크리스마스 선물은 내가 일곱 살이던 해, 셍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였다. 학교 교육조차 충분히 받지 못했던 우리 집 산타할아버지의 눈엔, 아마도 표지도 예쁘고 삽화도 있는 그 책이 일곱 살 꼬맹이에게 딱 맞아 보였을 것이다. 나는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까지 보고 금세 책을 덮어버렸다. 그렇게 책은 시간이 지나 몇 번의 이사를 거치며 사라졌다. 이후 산타할아버지는 몇 해에 한 번씩 띄엄띄엄 선물을 주셨는데, 그건 아마 내가 종종 나쁜 아이였기 때문일 것이다.

고등학생이 되던 해, 은밀히 ‘우정’의 편지를 주고받던 교회 여사친이 여우 이야기를 인용한 일이 있었다. 어릴 적 받았던 첫 크리스마스 선물이 문득 떠올랐다. 도서관으로 달려가 책을 다시 꺼내 읽었다. 당시의 나는 그런 철학적인 동화에 큰 흥미를 느끼지 않았고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편지에 인용하기 좋은 구절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억지로 읽었던 것 같다. 그때 선물할 책은 반드시 내가 먼저 읽어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을 것이다.

선물 고르는 센스가 부족하고, 고집이 세며 권위적이고, 일하지 않을 때는 늘 술에 취해 있었지만, 자식들에게만큼은 언제나 따뜻했던 우리 집 산타할아버지는 이제 뇌졸중으로 몸이 불편해지셨다. 얼마 전 찾아뵈었을 때, 크리스마스 선물 이야기를 꺼내 보았는데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하긴 그깟 크리스마스가 뭐라고 아직 기억하겠는가. 2회차 산타란 없다. 누구나 산타는 처음이고 이런저런 실수를 반복하다가 할만하면 은퇴하고 마는 것이다. 은퇴한 산타는 나무늘보처럼 외롭게 느릿느릿 살다가, 어린 왕자처럼 자기 별로 홀연히 떠나버릴 것이다. 그렇게 누구에게나 인생의 어느 순간, 산타 없는 크리스마스가 찾아오는 법이다.

어린 왕자의 삽화. 작품의 마지막 장, 사막에서 조용히 쓰러져 주저앉은 어린 왕자를 그린 그림이다. 하늘에서는 하나의 별, 아마도 그가 돌아가게 될 별이 빛을 내려 쬐고 있다. 어린 왕자 앞에는 한 떨기 꽃이 피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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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log ETC

아바타, 추억

제임스 캐머런의 아바타를 당시 회사 근처 개봉관에서 보았던 기억이 망령처럼 떠올랐다. 2009년 12월, 추웠지만 두근거렸고 끝내 슬퍼졌던 그날 밤, 피곤한 남자에겐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없었다. 가까운 곳에 앉았지만, 푸른 거인들이 뛰어다니는 스크린은 너무나 멀어 보였다. 미래에서 온 나의 유령과 만나는 내 과거의 유령을 보았다. 시끄럽고 어지러운 환상들이 배회하는 공간에서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우리의 심장은 함께 뛰었고 시공간의 온도를 미세하게 높였다. 붙잡고 싶었고 뿌리치고 싶었다. 수수께끼 같은 인사를, 거짓말을 나누면서 우리는 판도라 행성을 떠났다. 우리가 잠시 그 자리에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끝을 향해 지나온 길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보낼 수 없었던 답장은 어느 버려진 서버에 절절한 이진 코드로 남았다가 무신경한 다른 코드가 덮어썼을 것이다. 미안한 마음은 전할 길이 없다. 그래서 삶이 종종 아프고 외로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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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log

치자나무꽃

인색한 하늘 야속하여 틈틈히 수돗물을 뿌렸더니 어느새 하얀 꽃이 피어났다. 치자꽃을 볼 때마다 그 단순명료한 구조와 색상 때문에 어딘지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강렬하게 마음을 사로잡는 향기를 맡아보면 쥐스킨트의 쟝 그르누이가 궁극의 향수를 몸에 쏟자 파리의 빈민들이 달려들어 뜯어먹는 그 결말이 쉽게 납득이 되는 것이다. 치자꽃 향기는 확실히 어떤 소유욕을 자극하는 면이 있다.

빌리 홀리데이의 치자나무꽃1사실은 개량된 원예품종인 꽃치자 머리장식 시그니처도 유명하다. 머리를 손질하다가 왼쪽 옆머리를 태워먹고 이를 가리기 위한 임기응변이었다고 한다. 반응이 좋자 이후로도 꾸준히 애용했다는 것이다.2참고: https://www.vogue.com/article/billie-holiday-gardenia-flower-hair-history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흑인 최초 아카데미 조연상을 받은 해티 맥데니얼이 시상식에서 치자꽃으로 장식했다고 하는데 우연인지 어떤 다른 맥락이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검은 머리에 장식한 하얀 꽃은 단순한 장식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걸까?

footnote
  • 1
    사실은 개량된 원예품종인 꽃치자
  • 2
    참고: https://www.vogue.com/article/billie-holiday-gardenia-flower-hair-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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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log Politics

투기꾼들의 대선

최저임금과 노동시간의 보호장치를 없애겠다는 사람이 당선되었다. 몰상식에는 한계가 없고 극우에게는 거리낄 게 없다. 여가부 해체, 종부세 폐지, 탈원전 정책 폐기 등 퇴행적 슬로건을 내걸었는데 그를 승리로 이끈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이른바 ‘정권교체 열망’이다.

후보별 지지이유
출처: 2022년 2월 7일 한겨레신문 기사, https://m.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1029980.html

정책, 공약, 자질, 이념 보다는 정권교체 한 가지이다. 정권교체를 바라는 이유를 가장 투명한 언어로 전시하던 공간은 부동산카페들이었다. ‘집으로 재미 좀 보려면 정권이 바뀌어야 한다’는 말을 누구나 했다. 윤석열은 주택공급을 늘리고 재건축과 재개발을 확대하며 세금을 줄이고 규제를 풀겠다는 노골적이고 자극적인 신호를 계속해서 던졌고 투기에 진심인 소시민들의 천박한 욕망이 이를 받았다. 민주당정부가 의도적으로 집값을 폭등시켰고 이를 안정시키겠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투기꾼과 워너비들은 집값이 안정되길 바라지 않는데, 윤석열이 내놓은 정책방향이 ‘안정’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잘 파악하고 있기에 그를 적극적으로 지지할 수 있다.

윤석열의 당선이 확정되자 이런 광고문자가 날아온다.

…… 국민의힘 윤석열 차기 대통령 당선되어 윤석열 관련 테마주 이번 주 안에 무조건 최소 800% 보장하겠습니다. 안철수후보가 윤석열후보와 단일화를 했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 있습니다. 그 이유 때문에 관련 테마주가 폭등할 예정인데요. …… 공개하는 이유는 500분에 한해서 다같이 그 종목을 탑승하신다면 최소 600% 폭등하는 이유입니다. (후략)

대선 직후 받은 광고문자 내용

21세기 남한에서 대통령선거란 대체 어떤 의미인가. 바닥을 알 수 없는 심연을 들여다 본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