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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너

1940년대 펄프 픽션에서 기본 아이디어를 가져온 셰인 블랙의 영화 <키스 키스 뱅뱅 (2005)>에는 재치 넘치는 대화가 많이 나온다. 주인공 해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하모니(미셸 모너핸)에게 미안하다는 의미로 “I feel badly“라고 하자, 하모니는 ‘badly’ 대신 ‘bad’를 써야 한다며 즉각 교정해 준다.

‘Badly’는 부사야. 그러니까 ‘feel badly’라고 하면 네가 느끼는 기능 자체가 고장났다는 뜻이 되는 거지.

해리는 이렇게 얻은 ‘지식’을 페리(밸 킬머)와 대화하면서 어설프게 써먹으려 한다. 페리가 화를 내며 그만 꺼지라는 의미에서 내뱉은 말에 딴죽을 건다.

페리: 가서 나쁜 꿈이나 꾸고(sleep badly), 질문이 있어도 연락하지 마쇼.
해리: bad
페리: 뭐라고?
해리: ‘Sleep bad’라고 해야죠. 안 그러면 잠을 자는 기능이…
페리: 뭔 개소리야? 문법을 어디서 처배운 거야? badly는 부사라고. 꺼져.

게임 <사이버펑크 2077>에 등장하는 캐릭터 주디 알바레스는 나이트시티 최고의 브레인댄스(Braindance, BD) 기술자이며 목스(Mox)라는 이름의 여성갱단 소속이다. 사이버펑크 세계관에서 브레인댄스란 신체 감각, 감정, 생각을 포함한 인간의 경험을 총체적으로 기록하고 재생하는 기술이다. 브레인댄스는 누군가의 경험을 그대로 재현할 뿐 아니라 당시의 생생한 감각, 희로애락의 감정을 직접 체험할 수 있게 한다. 주디는 BD가 “순수한 형태의 감정”이라고 말한다.

주디는 레즈비언이다. 주인공 캐릭터인 V가 여성일 경우에만 그녀와 친구 이상의 관계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런 과정의 정점에 있는 퀘스트가 <깊이 빠지다>1영어판 퀘스트 제목은 <피라미드 송>이다. 퀘스트의 제목이 라디오헤드의 곡 제목이기도 하고 내용에 있어서도 그 유명한 뮤직비디오를 노골적으로 오마쥬한다.인데, 지연된 즐거움을 주는 소소한 대화 선택지가 있다. 댐 건설로 수몰된 고향 마을로 다이빙해 들어가는 내용의 퀘스트 도입부에서 주디의 다이빙슈트가 잘 어울린다고 칭찬하면 ‘맥스텍 유니폼을 입은 모습을 봐야 하는데‘라고 한다. 그런 것도 있냐고 물으면, 내기에서 땄고 아직 옷장에서 적절한 때를 기다리고 있다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인다.

별 의미없이 주고받은 농담같지만, 한참 후에 주디의 집에 가보면 실제로 맥스텍 유니폼세트를 찾을 수 있다. 물론 다이빙슈트 핏을 칭찬하지 않고 넘어갔다면 맥스텍 유니폼도 없다. 이런 게 CD Projekt RED의 유머감각일 것이다.

주디는 V와 함께 다이빙하는 경험을 브래인댄스로 녹화하고 싶어 한다. 다만 이번에는 두 사람의 뇌가 연결된 채 같이 녹화한다는 점이 다르다. 이런 특수한 설정 때문에 V는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물속에서 주디가 떠올리는 어린 시절 기억을 마치 자신의 기억처럼 감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조부모 슬하에서 자란 주디가 어린 시절 또래들로부터 따돌림받았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주디가 숨겨놓은 인형도 찾게 되는데, 주디가 일방적으로 좋아하던 친구의 인형이었다. 호감이 있지만 그 감정을 인정할 수 없어서 반대로 행동했던 것일까. V는 주디의 회상을 들으면서 생생한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물속의 성당에서는 어린 주디가 울림을 느끼기 위해 냈던 그 소리를 듣는다. 이후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V는 주디의 이미지를, 주디는 V의 이미지를 영원히 소유하게 된다. 육체적인 결합 이전에 감정과 감각의 결합이 우선했다.

또 다른 캐릭터인 팬앰에게도 독특한 연출이 준비되어 있다. 퀘스트라인의 끝부분에서 V와 팬앰은 바실리스크라는 이름의 군사 장비에 몸을 싣는데, 바실리스크에 설비된 감각 피드백 기술 덕택에 둘의 신경계가 하나로 얽힌다. 그로테스크한 조명이 비추는 좁은 조종석에서 두 사람은 상대의 감각을 자신의 것처럼 느끼면서 사랑을 나눈다. 이쯤 되면 “feel badly”라는 문법적 농담에 뼈가 생긴다. 기분에 대한 형용사가 아니라 감각하는 기능을 수식하는 부사가 필요해진다.

BD는 80년대의 상상력에 크게 기대고 있는데, 더글라스 트럼벌의 영화 <브레인스톰>에 등장하는 경험을 기록하고 재생하는 기술, 그리고 윌리엄 깁슨의 소설 <뉴로맨서>에 나오는 simstim(simulated stimulation) 장치가 큰 영향을 미쳤다. 비슷한 시기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도 자신의 잠재의식을 암호화키로 사용하는, 정신분석과 사이버펑크가 매시업된 느낌의 기술이 등장한다는 점도 언급해 두고 싶다.

제임스 캐머런이 각본을 쓰고 캐서린 비글로우가 연출한 1995년 영화 <스트레인지 데이즈>에도 이와 유사한 장비가 등장한다. SQUID라 불리는 이 장치는 로드니 킹 사건과 1992년 LA 폭동의 기억을 불러오는 세기말의 로스앤젤레스를 배경으로, 주로 스너프 디스크를 생산하고 유통하는 데 사용된다. 특히 희생자의 눈을 가린 채 스퀴드를 씌워, 폭행당하는 자신을 가해자의 시점으로 보도록 강제하는 시퀀스는 극도로 끔찍하다. 주인공 레니(레이프 파인스)는 이 디스크를 체험하고 나서 심각한 고통에 시달리는데, 이는 안전한 거리에서 폭력을 관음해 온 관객들을 향한 윤리적 힐난처럼 기능한다. 이 영화에서 스퀴드는 카메라의 극단적인 은유다. 스너프를 생산하는 미디어이면서, 동시에 부조리한 현실을 폭로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리리스가 남긴 기록은 무고한 흑인 셀럽을 살해하는 경찰의 폭력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증거로 작동하며, 영화는 이미지가 범죄의 공범이 될 수도, 진실을 드러내는 증언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사이버펑크 2077>에서 조니(키아누 리브스)는 V에게 아라사카의 미코시가 왜 나쁜지 묻는다. 미코시란 기업이 인간의 인격 구성체와 디지털화된 정신체를 수집해서 보관하는 데이터베이스, ‘영혼의 감옥’을 지칭한다. 게임 상에서 미코시는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영생의 프로젝트로도, 인격을 편집하고 조작하는 기술로도 그려진다. 이렇게 인격의 핵심요소가 디지털화되어 조작의 대상이 되는 세상에서 나의 존재는 무엇이 담보하는가? 데카르트 식으로 사유하자면, 감각은 속일 수 있고, 꿈과 현실을 구별하기 어렵고, 심지어 악마가 모든 믿음을 조작할 수 있다고 가정하면서도 완전히 의심할 수 없는 출발점은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게 의심하고 생각하는 자가 과연 나인가? 나의 사이버웨어에 복사된 다른 누군가의 정신체가 대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이버펑크 세상을 지배하는 기업의 입장에서는 하찮은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자본의 관점에서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인간으로서 노동자는 관심 대상이 아니니까.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노동 자체가 필요한 것이며, 심지어 노동을 제공하는 주체가 인간일 필요도 없다. 조니는 미코시를 테러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사이버펑크식 억압 구조에 균열을 만들려고 한다. 플레이어는 대부분 조니의 의지를 대리 수행하는 길, 미코시를 파괴하려는 싸움을 하게 된다.

푸엔테스의 <아우라>가 떠오른다. 광고를 보고 찾아간 노파 콘수엘로의 고풍스러운 집에서 그녀의 남편 요렌테 장군이 남긴 미완의 기록을 완성하는 일을 진행하게 된 젊은 사학자 펠리페가 주인공이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콘수엘로의 조카인 아우라와 만난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펠리페와 요렌테, 아우라와 콘수엘로의 이미지들이 혼란스럽게 겹친다. 이 몽환적이고 초현실적인 짧은 고딕 소설은 이인칭 시점으로 쓰여있다. 이 독특한 서술방식은 모든 문장을 최면술사의 주문처럼 만들고, 시간과 공간, 이성과 환상, 현실과 꿈, 산 자와 죽은 자 간의 경계를 점진적으로 무너뜨린다. 종국에는 ‘너’로 호명되는 존재가 펠리페인지 요렌테인지 다른 누구인지도 모호하게 된다. ‘너’라는 주어는 ‘나’와는 달리 본래 고정된 정체성이 없는 언제든 다른 대상을 가리킬 수 있는 빈자리가 아니던가.

<아우라>의 이인칭은 그래서 결정적이다. ‘너’는 언제나 호출되지만 결코 고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독자를 가리키기도, 인물을 가리키기도, 이미 죽은 자의 잔향을 가리키기도 한다. 사이버펑크의 세계에서 ‘나’가 데이터로 분해되고 기업의 저장소에 보관될 수 있다면, ‘너’는 오히려 마지막까지 붙잡히지 않는 대명사다. 미코시가 봉인하려는 것은 인격이지만, <아우라>가 끝까지 미끄러뜨리는 것은 정체성이다. 누가 생각하고 있는가, 누가 느끼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주어를 잃는다.

어쩌면 우리는 늘 이렇게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기억을 빌려 사랑하고, 누군가의 언어를 빌려 사과하며, 누군가의 시점으로 세계를 통과한다. 그럼에도 어떤 순간에는—물속의 성당에서 울림을 시험하던 어린아이의 목소리처럼—도저히 대체될 수 없는 감각이 남는다. 그것은 문법으로는 교정할 수 없고, 기술로는 완전히 포획되지 않으며, 이인칭으로 불릴 때 가장 또렷해진다. 결국 남는 것은 선언이 아니라 호명이다. 어느 순간 내 존재를 확신하기 힘든 순간이 올지라도, 누군가에게 불리고, 그 부름에 떨리듯 반응하는 순간만큼은 대체될 수 없다.

footnote
  • 1
    영어판 퀘스트 제목은 <피라미드 송>이다. 퀘스트의 제목이 라디오헤드의 곡 제목이기도 하고 내용에 있어서도 그 유명한 뮤직비디오를 노골적으로 오마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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