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ies
ETC Quote

트로츠키의 꿈

트로츠키는 1935년 6월 25일 밤, 죽은 레닌과 대화를 나누는 꿈을 꾼다.

“어젯밤, 혹은 정확히 말하면 오늘 새벽, 나는 레닌과 대화를 나누는 꿈을 꾸었다. 주변 상황으로 보아, 그것은 한 배의 삼등실 갑판에서 이루어진 듯하다. 레닌은 침대에 누워 있었고, 나는 그 옆에 서 있거나 앉아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내 병세에 대해 걱정하며 물었다. ‘신경 피로가 누적된 것 같군. 당신은 쉬어야 해…’ 나는 피로를 빨리 회복하는 데 타고난 활력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문제가 더 깊은 곳에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레닌은 단어를 강조하며, ‘진지하게 여러 의사들에게 상담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이미 많은 상담을 받았다고 답하며, 1926년 베를린 여행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레닌을 바라보던 중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나는 이 생각을 빨리 떨쳐내 대화를 끝내려 했다. 내가 베를린에서의 치료 여행에 대해 이야기를 끝마쳤을 때, ‘이것은 당신이 죽은 후의 일이었소’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대신 ‘당신이 병에 걸린 후의 일이었소’라고 말을 바꿔 말했다.”

레닌은 자신의 죽음을 모르고 있으며 트로츠키는 그의 죽음을 알리지 못한다. 그러니 레닌은 계속 살아있는 셈이다. 이런 환상적인 얘기 좋아한다.

Categories
Quote

트라우마, 내러티브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주체가 보고하는 개개의 사실들이 가진 결함들 그 자체가 그것의 참됨을 증언해주는 것이다. 보고되는 내용이 보고되는 형식을 오염시켰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

셈프룬1https://ko.wikipedia.org/wiki/%ED%98%B8%EB%A5%B4%ED%97%A4_%EC%85%88%ED%94%84%EB%A3%AC의 소설2그의 첫 소설 <Le grand voyage>에서 제라르는 부헨발트에 트럭 한 대 분량의 폴란드 유대인들이 도착하는 것을 목격한다. 그들은 화물 열차 한 칸에 거의 200명씩이나 쑤셔 넣어진 채 춥디추운 한겨울에 음식도 물도 없이 며칠씩 끌려와야 했다. 도착했을 때는 시쳇더미 한가운데서 온기를 유지할 수 있던 15명의 어린아이를 뺀 모든 사람이 얼어 죽어 있었다. 아이들을 열차에서 내리게 한 뒤 나치들은 개를 풀어놓았다 곧 걸음이 날랜 두 아이만 남았다.

“작은 아이가 뒤처지기 시작했다. SS들이 뒤에서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곧 개들도 길게 울부짖기 시작했다. 피 냄새가 그들을 미치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두 아이 중 큰 아이가 속도를 늦추더니 작은 아이 손을 잡았다. …… 그렇게 둘이서 손을 잡고 몇 야드인가를 더 갔다. …… 그러다 사방에서 쏟아진 곤봉 세례가 두 아이를 쓰러뜨렸다. 두 아이는 함께 쓰러졌는데, 얼굴을 땅에 처박고 손은 영원히 꼭 잡은 채였다.”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영원성의 동결이 (다시) 부분 대상으로서의 손에서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두 소년의 몸은 사라지고 있지만 꽉 움켜잡은 두 손은 첼시 고양이의 미소처럼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 <<헤겔 레스토랑>>

footnote
Categories
Film Quote Review

컴플리트 언노운

1960년대 중반 혹독한 투어 일정을 버티기 위해 그가 사용했던 대량의 암페타민에 대해 다룬 전기 영화는 어떨까? 오토바이를 타고 떠나는 멋진 모습만 보여주는 대신, 1966년 그가 겪었던 심각한 오토바이 사고와 이후 2년 동안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졌던 시간들에 대해 조명하는 것은 어떨까? 복음주의 기독교로 개종하고 가스펠 앨범을 발표했던 시기, 그리고 1971년 이스라엘을 방문하고 초정통파 유대교 하바드-루바비치 운동을 지지했던 그의 유대인 정체성에 대한 복잡한 관계도 탐구해볼 가치가 있다. 그의 Great American Songbook 커버곡들, 크리스마스 앨범, 그리고 대부분 실망스러운 영화 배우 및 감독으로서의 경력은 어떨까? 아프리카를 돕는다는 모호한 취지로 진행된 자선 노래 <We Are the World>에서 다른 스타들 사이에서 웃음을 자아내는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여줬던 그의 퍼포먼스, 그리고 2000년대 내내 지속된 Never Ending Tour가 신의 명령에 따라 투어에 헌신해야 한다는 그의 신념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도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https://jacobin.com/2025/01/chalamet-bob-dylan-biopic-review

무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밥 딜런의 천재성을 찬양하는 전기 영화라면, 굳이 보고 싶지 않은 이런 삐딱한 마음.

Categories
Politics Press Quote

跳梁跋扈

‘도량’은 ‘거리낌 없이 함부로 날뛰어 다님’이라는 뜻으로 ‘한서’, ‘장자’ 등에 쓰였고, ‘후한서’에 등장하는 ‘발호’는 권력을 남용해 전횡을 일삼는 장군을 비판할 때 쓰였다. 도량발호는 이 둘을 합친 말이다.1<교수들 선정 올해의 사자성어 ‘도량발호’…“권력이 함부로 날뛴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schooling/1171908.html

후보였던 사자성어도 재미있는데, 석서위려(碩鼠危旅) ➡️ 머리가 크고 유식한 척하는 쥐 한 마리가 국가를 어지럽힌다는 의미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 국정농단 사건에 분노한 시민들의 촛불이 타오르고 국회가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가결했던 2016년 ‘올해의 사자성어’는 ‘군주민수’(君舟民水)였다. ‘강물(백성)이 화가 나면 배(임금)를 뒤집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듬해 2017년에는 박 전 대통령의 파면 이후 새 정부가 적폐청산에 나섰다는 점을 들어, ‘사악한 것을 부수고 바른 것을 드러낸다’는 뜻의 ‘파사현정’(破邪顯正)이 선정됐다.2같은 글

footnote
Categories
Politics Press Quote

볼프강 슈트릭

2024년 11월 28일 뉴욕타임즈에 올라온 크리스토퍼 콜드웰의 에세이 <This Maverick Thinker Is the Karl Marx of Our Time>는 뉴레프트저널에 기고한 에세이들로 유명한 독일의 사회경제학자 볼프강 슈트릭를 매우 상세히 소개한다.

슈트릭은 신자유주의 기획에 내포된 역설에 대해 명확한 통찰을 제시한다. 글로벌 경제가 “자유롭기” 위해서는 오히려 제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옹호자들이 말하는 자유 시장이란 규제가 완화된 시장을 의미한다. 그러나 탈규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보기보다 훨씬 복잡하다. 자유로운 사회에서 규제란 인민들이 자율적으로 규칙을 제정할 수 있는 주권적 권리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세계의 사회가 민주적일수록 그 사회의 특성이 독특해지며, 경제적 규칙들이 서로 달라질 가능성이 커진다. 하지만 기업들은 적어도 글로벌화 측면에서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 자본과 상품은 국경을 넘어 마찰 없이 효율적으로 이동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일관된 법체계가 필요하다. 결국 민주주의는 일정 부분 양보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민주주의와 글로벌 자본주의가 일으키는 모순은 제국주의의 횡포로 이어지게 되는데, 제국 수준에서 일어나는 일이 글로벌화 규칙을 만드는 미국과 서유럽 사회 내의 지역 수준에서도 발생한다. 민주주의와 대립하는 경제 정책들이 수립되고 불공정한 결과를 만들어 낸다.

“글로벌 경제”는 일반 대중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공간이다. 슈트릭은 1970년대 이후 좌파 정당들이 이러한 문제를 간과했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산업 노동자를 중심으로 노동자 권리와 생활 수준을 주된 관심사로 삼았던 기존의 구조에 인권과 ‘깨어있는 정신'(wokeism)이라는 원칙 집합과 같은 가치 체계를 홍보하는 데 관심을 둔 지식인들이 침투하여 전복시키는 것을 허용했다.

슈트릭은 민주주의를 옹호한다고 주장하는 엘리트들에 의해 민주주의가 저지되고 있기 때문에 위기에 처했지만 일반 대중 사이에서는 민주주의가 활발히 살아 있다고 본다. 지난 20년 동안 적어도 진정한 대중의 정서를 반영하는 후보를 내세우는 정당의 경우 투표 참여율이 가파르고 꾸준히 상승했음을 지적한다.

좌파는 포퓰리즘을 받아들여야 한다. 포퓰리즘은 단지 글로벌리즘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는 투쟁에 붙여진 이름일 뿐이다. 글러벌리즘이 스스로의 모순에 의해 붕괴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제 모든 진지한 정치적 움직임은 어떤 형태로든 포퓰리즘적일 수밖에 없다.

Categories
Book Quote

창조의 정신분석

에릭 프랭크 러셀의 짧은 단편 <The Sole Solution>을 슬라보예 지젝이 인용하길래 찾아봤다.

https://archive.org/details/Fantastic_Universe_v05n03_1956-04/page/n109/mode/2up

그는 어둠 속에서 곱씹었다. 그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떤 목소리도, 속삭임도, 손길도 없었다. 다른 존재의 온기도 없었다. 어둠. 고독. 온통 검고 고요하며 아무것도 섞이지 않는 데서 오는 영원한 얽매임. 사전 정죄 없는 감금. 죄 없는 형벌. 벗어날 방법을 찾아내지 않는 한 견뎌야만 하는 견딜 수 없음. 바깥에서 오는 구출의 희망이란 없다. 다른 영혼, 다른 마음에 슬픔이나 연민, 동정이란 없다.

그리하여 그는 해법을 꿈꾼다.

가장 쉬운 탈출은 상상을 이용하는 것이다. 구속복에 갇힌 이는 자신만의 꿈나라를 모험하며 신체의 덫에서 탈출한다. 하지만 꿈으로는 충분치 않다. 꿈은 현실이 아니고 지나치게 짧기 때문이다. 얻어내야 할 자유는 진짜여야 하고 오래도록 지속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꿈에서 엄정한 현실, 영원히 지속될 만큼 치밀하게 만들어진 현실을 만들어야 했다.

모든 세부 사항을 계획하는 오랜 노력 끝에 실천할 때가 도래했다.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다. 실험을 시작해야 한다. 그는 고개를 앞으로 숙이고 어둠을 응시하며 말했다. “빛이 있으라.” 그러자 빛이 있었다.

Categories
Press Quote

불로소득

불로소득이 고생하지 않고 공짜로 벌어서 문제인 것이 아니듯이, 고생해서 벌었다고 임금 노동이 정당한 것도 아니다. 임금 노동과 근로소득에만 집중하면 능력주의에 따른 소득 격차를 정당화하고, 어린이·노인·장애인 등 노동 능력이 모자란다고 여겨지는 이들에 대한 차별로 이어질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불로소득이 필요하다. 사회의 공적 절차를 통한 복지 급여가, 꼭 현금 급여가 아니어도 주거, 교육, 의료 등을 보장하는 ‘사회임금’이 필요하다. 장애운동에서는 ‘개인이 지닌 현재의 조건 및 능력에 비춰 볼 때 그 활동이 사회 구성원의 물질적, 정서적, 정신적 삶에 기여하는가’를 기준으로 공공시민노동을 개념화하고 소득을 지급하자고 제안한다. 이렇게 보면 존재 자체,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 자체가 노동이다. 노동과 소득을 사회적 관계에서 인식하고, 존재 자체의 가치를 인정하는 데서부터 불로소득을 극복하는 힘이 나올 것이다.

공현, <불로소득>
Categories
Quote

일괴암

나는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모순은 서울 중심주의, 수도권 중심주의라고 생각한다. 주요 모순, 근본 모순이다. 계급, 젠더, 부동산, 교육, 정치, 의료 등 모든 문제가 여기서 나온다. 말할 것도 없이 보이는 권력, 보이지 않는 권력, 문화, 사람, 금융, 일자리 등 모든 자원이 서울에 있다. 집중이 아니다. ‘그냥 다 있다’. 이른바 진보 인사, 맑스주의자, 페미니스트들도 거의 서울에 산다.

정희진, 「일괴암一塊岩의 공포, 서울 이야기」, 『뉴 레디컬 리뷰』 제2권 제3호, p. 327.
Categories
ETC Quote

우문현답

바둑 세계 대회 시작 이래 볼 수 없었던 성 대결을 성사시킨 최정 9단은 중앙일보에 여성 바둑 기사로서의 한계를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여자가 남자보다 왜 바둑을 못 둘까’라는 질문을 정말 많이 들었다. 그 이유를 계속 찾았는데 찾기 시작하면 끝이 없었다. 이유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라면서도 “그 이유를 계속 찾을수록 무의식적으로 사회적 편견을 갖게 되고, 내가 원하는 곳에 닿을 가능성이 점점 낮아진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그 이유를 찾기보다 내가 원하는 목표에 집중하려고 한다”라고 말했어요.

허스트중앙 엘르, <바둑 역사상 최초! 세게 메이저 준우승한 여성 기사 최정 9단이 맞서온 편견>, 2022. 11. 11.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던져오던 어려운 응수타진에 가장 완벽한 정수를 찾아 착수한 최정 선수. 정말 이 선수의 헤아리기 어려운 그 깊이에 매번 감탄하게 된다.

Categories
Book Quote

범죄의 정의

페르 발뢰와 나는 ‘마르틴 베크’ 시리즈로 스웨덴 사회가 십 년에 걸쳐서 변해가는 모습을 기록하고자 했습니다. 말하자면 스웨덴 사회를 해부하려 했습니다. 우리는 좌파의 시각에서 사회를 묘사하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처음에 시리즈의 부제를 ‘범죄 이야기’라고 붙였는데, 여기에서 범죄란 말을 사회가 노동계급을 버렸다는 뜻으로 사용했죠.

마이 셰발, <<로재나>>, 한국어판 서문

박찬욱의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소품으로 잠깐 등장하는 것을 눈여겨 보고 바로 구입한 국내판 마르틴 베크 시리즈의 첫 편을 펼치니 이런 근사한 서문이 반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