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우리가 직면한 불편한 진실은, 민주주의가 기대고 있는 경제적‧정치적 제도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불공정한 권력 집중으로 흐르게 되고, 그 권력이 결국 민주주의 자체를 위협하게 된다는 점이다. 만약 우리가 파시즘을 민주주의 내부에서 생겨날 수 있는 위험으로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계속 외부의 일로만 여긴다면, 트럼프 같은 인물들과 그가 이끄는 과두 정치 세력의 부상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보편적인 개인의 권리’를 내세우는 민주주의가 어떻게 오히려 권위주의적 논리로 변질될 수 있는지도 끝내 직시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1Rafael Holmberg, The Fascist Tendencies of Democracy
<참여사회> Vol.324에 실린 최성용의 글 ‘언어와 주체의 갱신: 12월 3일 이후의 세계’에 따르면 2024년 광장은 광장의 계보 위에서 두 가지가 변별된다. 우선 민주당과 광장 사이 ‘미싱링크’가 발생했는데 이는 민주-진보연합이 불가역적으로 파열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두 번째는 시민들이 기존의 사회운동과 긴밀하게 ‘링크’되고 있다는 것인데, (이러한 관점이 엄밀한 분석에 기댄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이를 전개하여 새로운 운동의 주체를 발견한다.
다른 하나는 1987년 직후 노동운동이나 시민운동의 발전 및 형성에 비견되는, 사회운동의 집단적 주체가 형성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 이전의 촛불 광장에서도 새롭게 운동에 진입하는 이들은 늘 존재했지만, 현재의 ‘말벌 동지’들은 페미니즘을 비롯해 시민사회의 기성세대와 일정하게 단절적인 사상과 의제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기존 사회운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또한 비상행동 내에서도 젊은 활동가들은 이전과 달리 평등하고 시민들에게 반응적인 광장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다. 서로 연결되고 집단적인 경험을 공유한 활동가들은 그간 침체된 시민사회에 새로운 흐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양상들이 장기적인 정치적 변화로 이어질 것이라 기대한다. 나는 포스트 1987년 체제의 가능성이 여기에 있다고 믿는다.
아라빈드 아디가의 <화이트 타이거>에 나오는 인상적인 시구가 떠오른다.
세상의 실로 아름다운 것을 목도하는 순간 사람은 노예가 되길 멈춘다.1이 번역은 넷플릭스의 영화판본에서 가져온 것이며, 베가북스의 한국어판은 같은 시구를 다소 실망스럽게 번역하고 있다: “그들은 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노예로 남아있다.”
footn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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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번역은 넷플릭스의 영화판본에서 가져온 것이며, 베가북스의 한국어판은 같은 시구를 다소 실망스럽게 번역하고 있다: “그들은 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노예로 남아있다.”
우리는 누군가가 되고 싶어할 수 있지만 그에게 성적 욕망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고, 동시에 누군가를 성적으로 욕망하면서 그 사람이 되고 싶어할 수도 있다. 이런 역학이 변화하고 뒤바뀔 때 우리는 놀라게 되기도 한다. 한 분석대상자가 최근 말하길, 자신과 파트너가 “같은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 성적 욕망이 갑자기 사라졌다고 했다.
<Palestine Exception>은 잰 해이컨과 제니퍼 루스가 공동 감독한 작품으로, 2024년 미국 대학 캠퍼스를 휩쓴 팔레스타인 연대시위와 이에 대한 억압적인 반발 — 그들은 이를 신매카시즘(New McCarthyism)이라고 부른다 — 을 다룬다. 잰 해이컨은 포틀랜드 주립대학교 심리학 명예교수이자 임상 심리학자이다.
근미래에 이 영화를 직접 보기는 힘들겠지만, 카운터펀치에 인터뷰가 실렸기에 읽어봤고1유료 구독자에게만 열리는 기사라 링크 생략, 영화가 다루는 주제와는 별개로 그가 임상 심리학자로서 한 답변이 흥미로워서 기록해 둔다.
저는 심리학자로서, 사람들이 어떤 것을 주목했다가 외면하는 방식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제 영화에서 억압된 역사나 기억을 회복시키는 것뿐 아니라, 처음에는 거부하거나 불안감을 느끼는 것을 어떻게 붙잡을 수 있는지 탐구합니다. 영화가 피상적인 영감을 주거나 “궁극적 승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차분하고 진중한 접근 방식을 취하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여기에는 싸울 가치가 있는 무언가가 있다”고 전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개인 영웅 서사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영화는 한 개인이 도전을 받고, 취약성이 드러난 후 승리하거나 비극적으로 몰락하는 이야기를 다루곤 하죠. 그러나 저는 집단적으로 무언가를 이루는 것, 그룹 간의 관계적 측면에 관심이 있습니다. 단지 윤리적, 정치적 헌신 때문에가 아니라, 서로에 대한 헌신 때문이죠. 제 영화들이 학생들이든, 어른이든 나이에 상관없이 사람들이 급진적인 삶이 더 흥미롭다고 생각하도록 영감을 주었으면 합니다. [웃음] 그리고 실현 불가능할지라도 다른 세상을 상상하고 밀어붙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저는 활동가들의 기쁨과 실망을 모두 영화에 담아내고 싶습니다.
다큐멘터리와 픽션 영화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다큐멘터리에는 방대한 자료와 아카이브를 선택하고 편집하는 주관적인 창작 과정이 있지만, 동시에 실제 사건을 가능한 한 사실적으로 재현하려는 관객과의 약속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제 다큐멘터리는 현장 연구와 참여적 행동 연구 방법에서 나왔으며, 어려운 상황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집단과 많은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저는 가장 극적이거나 영웅적인 이야기에만 집중하지 않고, 집단적 경험을 잘 나타내는 장면을 선택하려고 합니다. 저는 사람들이 실제로 경험한 것에 대한 경험적 충실성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많은 픽션 영화, 특히 역사를 다루는 내러티브 영화는 여전히 가장 극적인 캐릭터에 관심을 두는데, 종종 남성 중심의 이야기입니다. [웃음] 이 점이 다르죠.
또한 과거의 캠퍼스 급진주의를 향한 향수가 있습니다. 역사를 현재와 연결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많은 캠퍼스, 제 학교인 포틀랜드 주립대를 포함해, 베트남 전쟁 시기에 건물을 점거했던 반전 활동가들을 기념하는 명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학생들의 급진적인 행동을 칭송했던 리더들이 오늘날 학생들이 하는 행동에는 충격을 받고 있습니다.
“어젯밤, 혹은 정확히 말하면 오늘 새벽, 나는 레닌과 대화를 나누는 꿈을 꾸었다. 주변 상황으로 보아, 그것은 한 배의 삼등실 갑판에서 이루어진 듯하다. 레닌은 침대에 누워 있었고, 나는 그 옆에 서 있거나 앉아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내 병세에 대해 걱정하며 물었다. ‘신경 피로가 누적된 것 같군. 당신은 쉬어야 해…’ 나는 피로를 빨리 회복하는 데 타고난 활력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문제가 더 깊은 곳에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레닌은 단어를 강조하며, ‘진지하게 여러 의사들에게 상담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이미 많은 상담을 받았다고 답하며, 1926년 베를린 여행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레닌을 바라보던 중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나는 이 생각을 빨리 떨쳐내 대화를 끝내려 했다. 내가 베를린에서의 치료 여행에 대해 이야기를 끝마쳤을 때, ‘이것은 당신이 죽은 후의 일이었소’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대신 ‘당신이 병에 걸린 후의 일이었소’라고 말을 바꿔 말했다.”
레닌은 자신의 죽음을 모르고 있으며 트로츠키는 그의 죽음을 알리지 못한다. 그러니 레닌은 계속 살아있는 셈이다. 이런 환상적인 얘기 좋아한다.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주체가 보고하는 개개의 사실들이 가진 결함들 그 자체가 그것의 참됨을 증언해주는 것이다. 보고되는 내용이 보고되는 형식을 오염시켰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
셈프룬1https://ko.wikipedia.org/wiki/%ED%98%B8%EB%A5%B4%ED%97%A4_%EC%85%88%ED%94%84%EB%A3%AC의 소설2그의 첫 소설 <Le grand voyage>에서 제라르는 부헨발트에 트럭 한 대 분량의 폴란드 유대인들이 도착하는 것을 목격한다. 그들은 화물 열차 한 칸에 거의 200명씩이나 쑤셔 넣어진 채 춥디추운 한겨울에 음식도 물도 없이 며칠씩 끌려와야 했다. 도착했을 때는 시쳇더미 한가운데서 온기를 유지할 수 있던 15명의 어린아이를 뺀 모든 사람이 얼어 죽어 있었다. 아이들을 열차에서 내리게 한 뒤 나치들은 개를 풀어놓았다 곧 걸음이 날랜 두 아이만 남았다.
“작은 아이가 뒤처지기 시작했다. SS들이 뒤에서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곧 개들도 길게 울부짖기 시작했다. 피 냄새가 그들을 미치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두 아이 중 큰 아이가 속도를 늦추더니 작은 아이 손을 잡았다. …… 그렇게 둘이서 손을 잡고 몇 야드인가를 더 갔다. …… 그러다 사방에서 쏟아진 곤봉 세례가 두 아이를 쓰러뜨렸다. 두 아이는 함께 쓰러졌는데, 얼굴을 땅에 처박고 손은 영원히 꼭 잡은 채였다.”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영원성의 동결이 (다시) 부분 대상으로서의 손에서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두 소년의 몸은 사라지고 있지만 꽉 움켜잡은 두 손은 첼시 고양이의 미소처럼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1960년대 중반 혹독한 투어 일정을 버티기 위해 그가 사용했던 대량의 암페타민에 대해 다룬 전기 영화는 어떨까? 오토바이를 타고 떠나는 멋진 모습만 보여주는 대신, 1966년 그가 겪었던 심각한 오토바이 사고와 이후 2년 동안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졌던 시간들에 대해 조명하는 것은 어떨까? 복음주의 기독교로 개종하고 가스펠 앨범을 발표했던 시기, 그리고 1971년 이스라엘을 방문하고 초정통파 유대교 하바드-루바비치 운동을 지지했던 그의 유대인 정체성에 대한 복잡한 관계도 탐구해볼 가치가 있다. 그의 Great American Songbook 커버곡들, 크리스마스 앨범, 그리고 대부분 실망스러운 영화 배우 및 감독으로서의 경력은 어떨까? 아프리카를 돕는다는 모호한 취지로 진행된 자선 노래 <We Are the World>에서 다른 스타들 사이에서 웃음을 자아내는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여줬던 그의 퍼포먼스, 그리고 2000년대 내내 지속된 Never Ending Tour가 신의 명령에 따라 투어에 헌신해야 한다는 그의 신념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도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후보였던 사자성어도 재미있는데, 석서위려(碩鼠危旅) ➡️ 머리가 크고 유식한 척하는 쥐 한 마리가 국가를 어지럽힌다는 의미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 국정농단 사건에 분노한 시민들의 촛불이 타오르고 국회가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가결했던 2016년 ‘올해의 사자성어’는 ‘군주민수’(君舟民水)였다. ‘강물(백성)이 화가 나면 배(임금)를 뒤집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듬해 2017년에는 박 전 대통령의 파면 이후 새 정부가 적폐청산에 나섰다는 점을 들어, ‘사악한 것을 부수고 바른 것을 드러낸다’는 뜻의 ‘파사현정’(破邪顯正)이 선정됐다.2같은 글
슈트릭은 신자유주의 기획에 내포된 역설에 대해 명확한 통찰을 제시한다. 글로벌 경제가 “자유롭기” 위해서는 오히려 제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옹호자들이 말하는 자유 시장이란 규제가 완화된 시장을 의미한다. 그러나 탈규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보기보다 훨씬 복잡하다. 자유로운 사회에서 규제란 인민들이 자율적으로 규칙을 제정할 수 있는 주권적 권리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세계의 사회가 민주적일수록 그 사회의 특성이 독특해지며, 경제적 규칙들이 서로 달라질 가능성이 커진다. 하지만 기업들은 적어도 글로벌화 측면에서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 자본과 상품은 국경을 넘어 마찰 없이 효율적으로 이동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일관된 법체계가 필요하다. 결국 민주주의는 일정 부분 양보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민주주의와 글로벌 자본주의가 일으키는 모순은 제국주의의 횡포로 이어지게 되는데, 제국 수준에서 일어나는 일이 글로벌화 규칙을 만드는 미국과 서유럽 사회 내의 지역 수준에서도 발생한다. 민주주의와 대립하는 경제 정책들이 수립되고 불공정한 결과를 만들어 낸다.
“글로벌 경제”는 일반 대중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공간이다. 슈트릭은 1970년대 이후 좌파 정당들이 이러한 문제를 간과했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산업 노동자를 중심으로 노동자 권리와 생활 수준을 주된 관심사로 삼았던 기존의 구조에 인권과 ‘깨어있는 정신'(wokeism)이라는 원칙 집합과 같은 가치 체계를 홍보하는 데 관심을 둔 지식인들이 침투하여 전복시키는 것을 허용했다.
슈트릭은 민주주의를 옹호한다고 주장하는 엘리트들에 의해 민주주의가 저지되고 있기 때문에 위기에 처했지만 일반 대중 사이에서는 민주주의가 활발히 살아 있다고 본다. 지난 20년 동안 적어도 진정한 대중의 정서를 반영하는 후보를 내세우는 정당의 경우 투표 참여율이 가파르고 꾸준히 상승했음을 지적한다.
좌파는 포퓰리즘을 받아들여야 한다. 포퓰리즘은 단지 글로벌리즘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는 투쟁에 붙여진 이름일 뿐이다. 글러벌리즘이 스스로의 모순에 의해 붕괴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제 모든 진지한 정치적 움직임은 어떤 형태로든 포퓰리즘적일 수밖에 없다.
그는 어둠 속에서 곱씹었다. 그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떤 목소리도, 속삭임도, 손길도 없었다. 다른 존재의 온기도 없었다. 어둠. 고독. 온통 검고 고요하며 아무것도 섞이지 않는 데서 오는 영원한 얽매임. 사전 정죄 없는 감금. 죄 없는 형벌. 벗어날 방법을 찾아내지 않는 한 견뎌야만 하는 견딜 수 없음. 바깥에서 오는 구출의 희망이란 없다. 다른 영혼, 다른 마음에 슬픔이나 연민, 동정이란 없다.
그리하여 그는 해법을 꿈꾼다.
가장 쉬운 탈출은 상상을 이용하는 것이다. 구속복에 갇힌 이는 자신만의 꿈나라를 모험하며 신체의 덫에서 탈출한다. 하지만 꿈으로는 충분치 않다. 꿈은 현실이 아니고 지나치게 짧기 때문이다. 얻어내야 할 자유는 진짜여야 하고 오래도록 지속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꿈에서 엄정한 현실, 영원히 지속될 만큼 치밀하게 만들어진 현실을 만들어야 했다.
모든 세부 사항을 계획하는 오랜 노력 끝에 실천할 때가 도래했다.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다. 실험을 시작해야 한다. 그는 고개를 앞으로 숙이고 어둠을 응시하며 말했다. “빛이 있으라.” 그러자 빛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