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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문현답

바둑 세계 대회 시작 이래 볼 수 없었던 성 대결을 성사시킨 최정 9단은 중앙일보에 여성 바둑 기사로서의 한계를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여자가 남자보다 왜 바둑을 못 둘까’라는 질문을 정말 많이 들었다. 그 이유를 계속 찾았는데 찾기 시작하면 끝이 없었다. 이유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라면서도 “그 이유를 계속 찾을수록 무의식적으로 사회적 편견을 갖게 되고, 내가 원하는 곳에 닿을 가능성이 점점 낮아진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그 이유를 찾기보다 내가 원하는 목표에 집중하려고 한다”라고 말했어요.

허스트중앙 엘르, <바둑 역사상 최초! 세게 메이저 준우승한 여성 기사 최정 9단이 맞서온 편견>, 2022. 11. 11.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던져오던 어려운 응수타진에 가장 완벽한 정수를 찾아 착수한 최정 선수. 정말 이 선수의 헤아리기 어려운 그 깊이에 매번 감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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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 9단

바둑실력뿐 아니라 인품도 너무나 훌륭하다. 삼성화재배 결승이 끝나고 이뤄진 기자회견 분위기는 승리한 신진서보다 패배한 최정에게 더 큰 관심이 쏟아지는 느낌이었다. 한 분야에서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으면서도 그저 그뿐인 사람도 있는데 최정 9단처럼 다방면에서 완성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도 있다. 이 선수가 앞으로도 계속 좋은 성적 거두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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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C

바둑, 단상

어제 치뤄진 2022년 삼성화재배 4강전. 최정 9단이 국내 랭킹 2위이자 상대 전적에서 0:5로 밀리고 있던 변상일 9단을 상대로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지금까지 여성 기사가 세계 대회에서 거둔 최고의 성적은 국내 국수 타이틀을 보유자이기도 했던 루이나이웨이(芮迺伟)가 거둔 응씨배 4강이다. 최정 선수는 남녀 통합 메이저 세계 대회의 결승에 오르는 최초의 여성 기사가 되었다.

최정 9단과 변상일 9단 기보 이미지

81, 93번과 같은 수들은 프로 해설자들과 AI조차 놀라게 만든 과감한 수였다. 당장 실리를 손해 보는 수이기 때문이다. 81번 수가 실리를 포기하더라도 공격으로 전단을 열어가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수라면, 93번 수는 최정 선수의 깊은 수읽기 능력을 보여주는 묘수이다.

변상일 9단은 별다른 고민 없이 94로 막았다가 95번 수를 맞고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스스로의 뺨을 세게 때리고 눈물을 훔치며 울기도 했다. 옆자리에 앉아서 대국을 하고 있는 최정 9단은 크게 내색하지 않았지만 매우 마음이 불편했을 것이다. 바둑이 끝나고 뛰쳐나가는 변상일 선수의 뒷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나서야 비로소 활짝 웃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다. 코로나 시대로 규칙이 바뀌어 세계 대회의 경우 보통 온라인 대국으로 치뤄지는데 국내 선수끼리 대국하는 경우에는 같은 방에 나란히 앉아 두게 되므로 나의 행동이 상대방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날 프로 선수들에게는 이기고 지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겠지만 바둑이 그 이상의 무엇이라고 여겼던 시절을 기억하는 입장에서 보면 쓸쓸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대부분의 기사들은 패배가 고통스럽더라도 상대 선수에 대한 예의와 품위를 지키려고 노력한다. ‘중요한 승부에서 패하고도 마음이 아무렇지 않다면 그것은 이미 프로가 아니다’라고 했던 이창호 9단도 이기나 지나 크게 동요하지 않는 모습으로 유명했다. 그런 그의 면모는 성적과는 별개의 어떤 경지를 느끼게 했고 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그를 바둑의 신으로 존경하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짤: "바둑 ㅇ같이 두네"
이세돌9단이 알파고를 상대로 1승을 거두는 대사건 후 네티즌 사이에 유행하던 합성이미지.

AI가 인간의 바둑을 이기면서 그동안 여러가지 의미를 가지던 바둑이 단 한 가지의 의미로 바뀌어 가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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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Quote

범죄의 정의

페르 발뢰와 나는 ‘마르틴 베크’ 시리즈로 스웨덴 사회가 십 년에 걸쳐서 변해가는 모습을 기록하고자 했습니다. 말하자면 스웨덴 사회를 해부하려 했습니다. 우리는 좌파의 시각에서 사회를 묘사하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처음에 시리즈의 부제를 ‘범죄 이야기’라고 붙였는데, 여기에서 범죄란 말을 사회가 노동계급을 버렸다는 뜻으로 사용했죠.

마이 셰발, <<로재나>>, 한국어판 서문

박찬욱의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소품으로 잠깐 등장하는 것을 눈여겨 보고 바로 구입한 국내판 마르틴 베크 시리즈의 첫 편을 펼치니 이런 근사한 서문이 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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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C Press

집값 상승 팩트체크

대선 기간 중 집걱정끝장넷에서 발표한 기획 보도자료.

  1. 주거빈곤가구 200만, 과장된 숫자가 아니다
  2. 임대차법 개정이 전월세 폭등의 원인이다?
  3. 집값 상승의 원인 공급부족에 있다?
  4. 주택가격 상승의 주 원인은 저금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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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log

치자나무꽃

인색한 하늘 야속하여 틈틈히 수돗물을 뿌렸더니 어느새 하얀 꽃이 피어났다. 치자꽃을 볼 때마다 그 단순명료한 구조와 색상 때문에 어딘지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강렬하게 마음을 사로잡는 향기를 맡아보면 쥐스킨트의 쟝 그르누이가 궁극의 향수를 몸에 쏟자 파리의 빈민들이 달려들어 뜯어먹는 그 결말이 쉽게 납득이 되는 것이다. 치자꽃 향기는 확실히 어떤 소유욕을 자극하는 면이 있다.

빌리 홀리데이의 치자나무꽃1사실은 개량된 원예품종인 꽃치자 머리장식 시그니처도 유명하다. 머리를 손질하다가 왼쪽 옆머리를 태워먹고 이를 가리기 위한 임기응변이었다고 한다. 반응이 좋자 이후로도 꾸준히 애용했다는 것이다.2참고: https://www.vogue.com/article/billie-holiday-gardenia-flower-hair-history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흑인 최초 아카데미 조연상을 받은 해티 맥데니얼이 시상식에서 치자꽃으로 장식했다고 하는데 우연인지 어떤 다른 맥락이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검은 머리에 장식한 하얀 꽃은 단순한 장식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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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itics

선거, 단상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는 너무나도 양식화되어 있고 지방선거는 더욱 더 그러해서 스스로를 우파라 칭하는 자들도 좌파라는 자들도, 극우 파시스트들도, 운동권 출신이라는 진보 어쩌고 후보도 번호와 색깔만 다를 뿐 똑같은 뽕짝메들리를 틀어대며 돌아다닌다. 선관위는 유세차량에서부터 선거과정의 세세한 요소들을 규격화하는 방식으로 제도를 다듬었고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이제 감도 안 잡힌다. 그냥 선거란 그런 것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암울한 생각만 든다. 색깔과 번호 외에는 도무지 구별되지 않는 그렇고 그런 사람들이 노래하고 춤추고 욕하고 떠들다가 꾸벅 절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으니 누구라도 찍어야 세상이 바뀔 거라고 말하는 게 최선일 리는 없다.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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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Science

동반자, 잡초

하지만 잡초들에겐 적어도 하나의 공통된 행동 양식이 있다. 그들은 인간과 함께 번성한다는 것이다. 잡초는 기생식물이 아니다. 그들은 인간이 없어도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우리 곁에서 유독 번성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자연계에서 그들의 생태적 협력자다. 잡초는 우리가 땅에서 하는 일을 좋아한다. 숲을 청소하고, 땅을 파고, 농사를 짓고, 영양분이 풍부한 쓰레기를 버리는 것 말이다.

<< 처음 읽는 식물의 세계사>>, 리처드 메이비. 2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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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bour Politics

52시간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윤석열 정부의 노동시간 유연화 정책과 관련해 “생산직은 (사무직과 달리) 주 52시간 이상 일하지 못하게 된 것에 대한 반발이 있다”며 주 52시간 상한제 적용 대상에서 배제할 수 있다는 태도를 밝혔다.

한겨레, 5월 17일, <이준석 “생산직, 주 52시간 이상 원해”…노동계 “임금구조 왜곡 간과”>

52시간 이상 일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임금이 낮으니 잔업하고 특근하는 거지. 32시간 정도 일하게 하고 52시간 이상의 돈을 주는 게 바람직한 해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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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Book

NFT 아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자매지로 창간된 <크리티크M>를 들추니 이른바 NFT 아트에 관한 칼럼이 눈길을 끈다. NFT 어쩌고 하는 수 많은 비전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는 차에 호크니가 NFT 아트 투자에 앞장 선 사람들을 “국제적인 사기꾼”이라고 단정짓는 대목을 만나니 반갑기도 했다. 그러니까, 여러 장의 사진을 짜깁기한 300메가바이트의 JPG 파일에 블록체인 기술을 적용해서 수백억 원에 팔았다는 건데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위화감이 사라지지 않는다.

Everydays
<Everydays: The First 5,000 Days>, Beeple

NFT 아트가 그저 이미지 파일이 아니라 예술작품으로 평가받으려면 오프라인 공간과 확연히 변별되는 의미를 창출해야 한다고 말한다.

단순히 오프라인 세계를 모방하는 시뮬라크르(Simulacre)에 그치지 않고, 그 자체로 의미와 진실을 추구함으로써 이전에 없던 세계를 창조해야 한다. 물론 그에 따르는 디지털 문해력, 틈새에서 발견될 또 다른 불평등도 대비해야 할 테다.

<<크리티크M>> 창간호, <비대면 시대>, 예술의 새로운 시도, 김지연, 25p.

코인의 거래시장은 현실 주식시장의 퇴폐적 측면을 일차적으로 모방하는 시뮬라크르인 것 같다. 최근 발생한 루나-테라 코인 사태는 그 모방된 욕망의 파국을 암시하는 게 아닐까. 그리고 해당 글과 멀리 떨어진 다른 글에서 어떤 통찰을 얻은 기분이 드는 건 착각일까.

오늘날 영화 예술은 조직적으로 평가 절하되고, 소외되고, 비하되면서 ‘콘텐츠’라는 최소한의 공통분모로 축소되고 있다. 15년 전만 해도 ‘콘텐츠’는 영화에 대한 진지한 대화를 나눌 때나 들을 수 있는 단어였으며, ‘형식’과 대비되고 비교되는 의미로만 쓰였다. 그런데 그 뒤로 예술형식의 역사에 대해 전혀 모르고, 심지어 알려고 하지도 않는 이들이 미디어 회사를 인수하면서 점차 ‘콘텐츠’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했다.

<<크리크M>> 창간호, <펠리니와 함께 시네마의 마법이 사라지다>, 마틴 스코세이지, 177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