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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는 삶

“I would rather be ashes than dust!
I would rather that my spark should burn out in a brilliant blaze than it should be stifled by dry rot.
I would rather be a superb meteor, every atom of me in magnificent glow, than a sleepy and permanent planet.
The proper function of man is to live, not to exist.
I shall not waste my days in trying to prolong them.
I shall use my time.”

나는 먼지가 되기보다 재가 되는 것을 택하겠다!
내가 피운 불이 화려한 불꽃으로 타오르다 꺼지는 것이,
썩은 나무가 되어 꺼지는 것보다 낫다.
나는 나태한 행성보다는 찬란한 유성이고 싶다.
인간의 본래 임무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이다.
나는 내 삶을 단순히 연장하려 애쓰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의 시간을 제대로 사용할 것이다.

— Jack London’s Credo

홍콩의 사민련(社會民主連線, League of Social Democrats, LSD)의 해산 선언문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난다.

“어둠을 두려워하지 말고, 무의미함 앞에서 주저하지 맙시다. 홍콩의 모든 어두운 구석에서, 우리는 확신으로 빛나기를 바랍니다.”1플랫폼.C, “홍콩 사회운동 최전선을 지키던 진보정당의 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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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적 여성

기표로 현실을 만들지 못하니 현실에 폭력을 가해 기표를 짜내려 한다. 생물학적인 여성만 여성으로 인정한다는 트럼프의 행정명령은 트랜스젠더를 배제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여성혐오적이다. 라캉적 의미에서 여성은 지워져서가 아니라, 고정된 의미가 부여됨으로써 억압당하지 않던가. la femme n’existe pas(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1https://www.lacan.com/nonexist.htm 남근이라는 기표로 (힘, 리더십, 성공 따위의 마초적인 상징들로) 대표되는 남성과 달리 여성은 기표화되지 않은 타자로 남는다. 그래서 늘 여자에게는 특정한 기표를 덧씌움으로써 억압이 작동하는 것이다. 권위주의는 부정형의 성적 타자에 대한 불안을 견디지 못한다. 때문에 폭력적으로 이를 봉인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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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파시즘

결국 우리가 직면한 불편한 진실은, 민주주의가 기대고 있는 경제적‧정치적 제도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불공정한 권력 집중으로 흐르게 되고, 그 권력이 결국 민주주의 자체를 위협하게 된다는 점이다. 만약 우리가 파시즘을 민주주의 내부에서 생겨날 수 있는 위험으로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계속 외부의 일로만 여긴다면, 트럼프 같은 인물들과 그가 이끄는 과두 정치 세력의 부상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보편적인 개인의 권리’를 내세우는 민주주의가 어떻게 오히려 권위주의적 논리로 변질될 수 있는지도 끝내 직시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1Rafael Holmberg, The Fascist Tendencies of Democra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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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차별

최근 역(逆)차별, reverse discrimination에 관한 몇몇 코멘트를 보면서 생각을 정리해 본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듯이, 역차별 주장은 차별이 본질적으로 권력과 제도, 역사에 뿌리를 둔 구조적 억압이라는 점을 무시한다. 차별을 개인적인 불공정 행위로 환원한다.

평등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를 테면, 기울어진 구조를 보정하는 조치, 다시 말해 평등을 수호하기 위한 조치가 자신에게 주어진 기득권(특권)을 침해한다고 판단한다. 그들의 평등은 일종의 레토릭으로서 개별 행위의 평면에서 작동하는 형식적인 것이다. 인간 개인에게서 사회적 관계를 사상하고 그들 (그러니까 추상적 인간) 모두에게 동일하게 대하는 것이 그들의 평등이다.

차별의 역을 상정함으로써 윤리적인 회피 효과를 얻는다. “너희가 차별받고 있다고 하지만 너희도 똑같이 우리를 차별하고 있다.” 가해와 피해가 전도되고 권력관계가 지워진다. 이렇게 기존의 차별을 형식적으로 뒤집는 역차별 개념은 구조적 권력 관계를 지우고 기존의 특권을 피해로 위장하고 실질적 평등을 위한 시도를 불공정으로 둔갑시킨다.

그러나 차별에 반대하는 목소리에는 스펙트럼이 존재하며 진보적 리버럴리즘의 위선적 태도는 비판의 여지가 있다. 최근 영화에 다양한 인종과 성 정체성, 성별이 포함되는 포용성 마케팅은 고무적으로 보이지만, 영화 산업의 소유 구조, 자본 배분, 노동 착취 등 근본적인 불평등 구조는 바뀌지 않는다. 대학이나 공공기관에서 인종, 젠더 관련 표현에는 민감하게 반응하고 규제하지만 그 내부에 존재하는 계급적 불평등에 대해서는 눈감는다. 겉으로는 포용과 평등을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기존 권력 구조를 재생산하거나 은폐한다. 표면적 다양성은 유지하지만 권력 구조는 건드리지 않는다. 표현의 폭력성은 제거하고 싶으나 구조적 폭력은 건드리지 않는다. 인권, 기후, 젠더 등에 대한 지지를 표현하면서도 정작 노동운동, 반자본 투쟁, 실질적 연대 등 구체적 실천에는 무관심하거나 소극적이다. 진보성은 도덕적 쾌락의 형식으로 소비된다.

반차별 인권운동의 문제는 역차별 따위가 아니라 어중간한 타협, 급진성의 부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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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호, 김주익

노무현 추모행사 관련 뉴스들을 흘려보내다가 가슴이 답답하여 배달호 열사 추모시집을 꺼냈다.

설거지하다 무심히 그의 집을 본 순간/ 티브이 속 기자의 두 팔이 30년 보일러공이었다는/ 그의 집 거실을 뚫고 방으로 꺽인 순간 식탁 놓을 자리도 없다/ 불평하던 우리 집 거실이 출렁출렁 넓어지던 순간/ 그가 분신했다는 공장 콘크리트 바닥과 농성 중인 깃발들을 뚫고/ 좁아터진 집 어딘가에 숨어있을 그의 노모 구부러진 생애가 보이는/ 순간 나는 냉동실에 갇혔다// (…) 얼마를 살았어야 우리 내놓고 사랑할 수 있었을까/ 방과 방 사이 소리와 소리 사이 방음벽을 치고/ 숨죽여 나누던 사랑의 시간, 그 짧던 모든 밤들이여/ 우린 몰래 사랑했다 가난하여 보일러실 불꽃처럼/ 안으로 타들어가기만 했으니 화석이 되어버린/ 이 몸뚱이는 뉘 육체를 입고 태어날 것인가 다시

김해자, “사랑하기에 충분한 시간” 中, 배달호 노동열사 추모시집 “호루라기”, 도서출판 갈무리, 2003, pp. 18.

기억해야 한다. 2003년 열사 정국은 노무현 정부의 노동 탄압에 대한 처절한 항거였다. 사람이 먼저라던 대통령에게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노동자들의 요구는 불순한 것이었다.

그리고 우린 또, 보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자본의 욕심을 보았다. 돈에 날이 밝고, 돈에 해가 지는 자본의 세상 한가운데서 살고 있는 노동자의 처절한 현실을, 그리고 우린 또, 보고 들어야만 했다. 가장 공평해야 할 사법부의 편애함을, 국민의 심부름꾼이 되어야 할 정치가의 오만함을, 가진 자의 편에 빌붙어 목숨을 아부하는 언론을 보았다.

객토문학 동인, 같은 책, pp.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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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87

<참여사회> Vol.324에 실린 최성용의 글 ‘언어와 주체의 갱신: 12월 3일 이후의 세계’에 따르면 2024년 광장은 광장의 계보 위에서 두 가지가 변별된다. 우선 민주당과 광장 사이 ‘미싱링크’가 발생했는데 이는 민주-진보연합이 불가역적으로 파열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두 번째는 시민들이 기존의 사회운동과 긴밀하게 ‘링크’되고 있다는 것인데, (이러한 관점이 엄밀한 분석에 기댄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이를 전개하여 새로운 운동의 주체를 발견한다.

다른 하나는 1987년 직후 노동운동이나 시민운동의 발전 및 형성에 비견되는, 사회운동의 집단적 주체가 형성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 이전의 촛불 광장에서도 새롭게 운동에 진입하는 이들은 늘 존재했지만, 현재의 ‘말벌 동지’들은 페미니즘을 비롯해 시민사회의 기성세대와 일정하게 단절적인 사상과 의제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기존 사회운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또한 비상행동 내에서도 젊은 활동가들은 이전과 달리 평등하고 시민들에게 반응적인 광장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다. 서로 연결되고 집단적인 경험을 공유한 활동가들은 그간 침체된 시민사회에 새로운 흐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양상들이 장기적인 정치적 변화로 이어질 것이라 기대한다. 나는 포스트 1987년 체제의 가능성이 여기에 있다고 믿는다.

아라빈드 아디가의 <화이트 타이거>에 나오는 인상적인 시구가 떠오른다.

세상의 실로 아름다운 것을 목도하는 순간 사람은 노예가 되길 멈춘다.1이 번역은 넷플릭스의 영화판본에서 가져온 것이며, 베가북스의 한국어판은 같은 시구를 다소 실망스럽게 번역하고 있다: “그들은 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노예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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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 번역은 넷플릭스의 영화판본에서 가져온 것이며, 베가북스의 한국어판은 같은 시구를 다소 실망스럽게 번역하고 있다: “그들은 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노예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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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우리는 누군가가 되고 싶어할 수 있지만 그에게 성적 욕망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고, 동시에 누군가를 성적으로 욕망하면서 그 사람이 되고 싶어할 수도 있다. 이런 역학이 변화하고 뒤바뀔 때 우리는 놀라게 되기도 한다. 한 분석대상자가 최근 말하길, 자신과 파트너가 “같은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 성적 욕망이 갑자기 사라졌다고 했다.

Darian Leader (McShrunk),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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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첨밀밀

1995년 5월 8일 등려군이 세상을 떠났다. 이 뉴스를 듣고 뉴욕의 거리를 걷던 장만옥이 어느 쇼윈도 텔레비전 앞에 멈춰 등려군의 생전 모습을 지켜본다. 여명은 마침 그곳을 지나치지만, 등려군의 이미지가 그를 당긴다. 낮에는 등소평을, 밤에는 등려군을 듣던 본토의 동지들은 제각기 달콤쌉싸름한 욕망의 환상통을 겪다가 자본주의 세상의 중심에서 비로소 마주 본다.

첨밀밀의 한 장면

영어 제목이 모든 것을 담고 있다. <Comrades, Almost a Love Story> 진가신 감독에 의하면 이것은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은 연인이 아니라 낯선 세계에 밀려온 외로운 이웃이다. 그들은 홍콩에 도착할 때 등을 맞대고 온다. 서로 알지 못하면서도 이미 서로를 의지했다. 영화 속 모든 인물은 상대를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 대상의 이미지를 소유하고 각자의 방식으로 헌신한다. 사랑에 대해 말할 필요 없다. 그들의 마음은 달빛이 대신 말해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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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log

걷는 자

우리 동네에는 방황하는 노인이 있다. ‘방황하는 유대인’에서 따와 내 멋대로 붙인 별명이다. 새까맣게 그은 얼굴 때문에 더 선명하게 보이는 짧고 단정한 백발이 깃발처럼 눈길을 끈다. 깔끔하게 면도한 얼굴과 검소하지만 청결해 보이는 옷차림을 보면 분명 자기 관리를 하는 분이다. 그는 일 년 내내 하얀 고무신을 신고 도무지 읽어낼 수 없는 표정을 한 채 하루 종일 이곳저곳을 걷는다. 이곳에 이사 오고 나서 거의 매일 마주치게 되자 어느 날은 나도 모르게 목인사를 하고 말았는데, 뜻밖에도 큼직한 미소를 만들어 보이며 답례하셨다. 내가 어설프게 대화를 건네려고 하자, 예의 그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금세 돌아가서 방금 있었던 만남의 순간을 털어내듯 가던 길을 서둘렀다. 그렇게 몇 번 더 인사를 주고받은 다음에서야 비로소 그분이 지적장애가 있는 분이라는 걸 눈치챘다. 

이웃 할머니에게 넌지시 여쭤보았더니 ‘걸음병’이라고 했다. 노인은 걷지 않으면 안 되는 병을 안고 태어났기에 평생 근방의 산과 들을 밤낮 가리지 않고 걸어 다녔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을 걷는 것도 봤다고 하셨다. 그렇게 하루 종일 걷는 자식을 애지중지 뒷바라지하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동생네 부부가 대신 돌봐주고 있기를 수십 년째라는 것이다. 할머니는 동생의 부인이 대단하다고 극찬했다. 혹 덩이 같은 시아주버니에게 매일 아침 깔끔한 옷을 내어주고 따스운 밥을 지어 먹이고 면도와 이발에 신경 쓰기를 지극정성으로 해냈다는 것이다. 그 제수씨라는 분의 고단했을 삶을 이리저리 상상해 보았다. 노인이 나이에 비해 건강해 보이는 데에는 매일 걷는 것도 도움이 되었겠지만, 뒤에서 묵묵히 돌봐주는 가족의 희생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저 멀리 정처 없이 걷는 노인의 흰머리는 일상의 풍경이었기에 어느 순간부터는 무심히 날아가는 까마귀나 길가에 핀 꽃다지처럼 배경으로만 존재하게 되었다가 그마저도 점차 흐려졌다. 

수년이 지났다. 그러니까 17년을 함께 한 우리 고양이를 떠나보낸 아픔으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던 때, 문득 살아남은 자의 저주받을 허기가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하자, 내가 그 노인을 못 본 지 꽤 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마을 풍경의 일부였던 존재의 부재에 대한 자각이 한없이 나를 불안하게 했다. 왠지, 그간 별 관심도 없던 그 노인이 무사하기를 격하게 빌었다.

다음 날 동네를 몇 바퀴 돌다가 텃밭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일을 하고 있던 이웃 할머니를 만났다. ‘걸음병’ 노인의 근황을 물었다. 코로나바이러스와 싸우면서 폐에 손상을 입고 십 년은 더 늙어버린 그 할머니는 흐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가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끝내 납득하지 못하셨다. 전설 속 방황하는 유대인처럼, 예수가 재림할 때까지, 시공간이 직조한 미로 안을 맹렬하게 떠돌 것같던 흰머리 노인의 뒤를 캐는 짓은 왠지 더 이상 계속할 수 없었다.

그 후로도 또 다른 몇 년이 지난 지금 나는 흰머리 노인에게 닥친 일을 알고 있다. 오래도록 병을 앓던 노인의 동생이 다른 모든 필멸자들처럼 질기고 무기력하던 삶에 마침표를 찍었다. 남편을 간병하면서 시아주버니까지 돌보던 강인한 할머니는 비로소 자유를 선택했다. 멀리서 사는 자녀들과 상의 끝에 그들의 큰아버지를 중증장애인을 돌보는 요양원에 보낸 것이다. 흰머리 노인은 그렇게 더 작은 미로에 갇혔다. 그의 옷은 제수씨가 아니라 시설과 계약맺은 전문업체가 세탁할 것이다. 이것이 동네 사람들에게 유포되고 있는 결말이다.

나는 다른 결말도 알고 있다. 걸음병 노인은 동생이 세상을 떠나자 갑자기 제정신을 찾았다. 삶의 저주에서 해방된 동생을 부러워한다. 평생 자기를 돌보면서 자기보다 더 늙어버린 제수씨를 보고는 가슴이 미어진다. 그에게 언도된 형벌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고 누구도 저지할 수 없다. 끝을 헤아려 보지만 무한을 감각할 수 없음에 현기증을 느낀다. 그에게 내려진 저주는 부수적 피해를 낳았다. 저주가 동생 가족에게 넘쳐흘렀다. 노인은 온전해진 정신이 다시 자신을 배신하기 전에, 잘 웃는 걸음병 환자가 아니라 폭력적이고 격리가 필요한 위험한 광인을 연기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렇게 그는 다른 누군가에게 때늦은 자유를 선사할 더 좁고 무해한 미로를 선택한다. 그는 이제 매일 알록달록한 알약을 삼키고 콘크리트로 된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복도를 하염없이 걷다가 마주오는 사람을 만나면 예의 그 큼직한 미소를 지어 보일 것이다. 그곳에서 그는 꿈속에서도 정처 없이 걷는다. 이것이 나만 아는 두 번째 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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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그룬디히

Victims of Fascism, 1946/49
〈파시즘의 희생자들〉, 1946.
레아와 한스 그룬디히, 1928
레아와 한스 그룬디히, 1928

한스 그룬디히의 초현실적이고 화려하면서도 불길한 색조가 가득한 그림을 보고 그의 생애를 찾아봤다. 드레스덴의 프롤레타리아, 철저한 공산주의자였고 나치에 저항하다 투옥되었으며 동독에서 마지막 영예를 누리다가 생을 마감했다. 독일 공산당 동지였던 아내 레아와 찍은 사진도 범상치 않다. 그의 이름은 구글 아트 & 컬처에서 검색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