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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너

1940년대 펄프 픽션에서 기본 아이디어를 가져온 셰인 블랙의 영화 <키스 키스 뱅뱅 (2005)>에는 재치 넘치는 대화가 많이 나온다. 주인공 해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하모니(미셸 모너핸)에게 미안하다는 의미로 “I feel badly“라고 하자, 하모니는 ‘badly’ 대신 ‘bad’를 써야 한다며 즉각 교정해 준다.

‘Badly’는 부사야. 그러니까 ‘feel badly’라고 하면 네가 느끼는 기능 자체가 고장났다는 뜻이 되는 거지.

해리는 이렇게 얻은 ‘지식’을 페리(밸 킬머)와 대화하면서 어설프게 써먹으려 한다. 페리가 화를 내며 그만 꺼지라는 의미에서 내뱉은 말에 딴죽을 건다.

페리: 가서 나쁜 꿈이나 꾸고(sleep badly), 질문이 있어도 연락하지 마쇼.
해리: bad
페리: 뭐라고?
해리: ‘Sleep bad’라고 해야죠. 안 그러면 잠을 자는 기능이…
페리: 뭔 개소리야? 문법을 어디서 처배운 거야? badly는 부사라고. 꺼져.

게임 <사이버펑크 2077>에 등장하는 캐릭터 주디 알바레스는 나이트시티 최고의 브레인댄스(Braindance, BD) 기술자이며 목스(Mox)라는 이름의 여성갱단 소속이다. 사이버펑크 세계관에서 브레인댄스란 신체 감각, 감정, 생각을 포함한 인간의 경험을 총체적으로 기록하고 재생하는 기술이다. 브레인댄스는 누군가의 경험을 그대로 재현할 뿐 아니라 당시의 생생한 감각, 희로애락의 감정을 직접 체험할 수 있게 한다. 주디는 BD가 “순수한 형태의 감정”이라고 말한다.

주디는 레즈비언이다. 주인공 캐릭터인 V가 여성일 경우에만 그녀와 친구 이상의 관계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런 과정의 정점에 있는 퀘스트가 <깊이 빠지다>1영어판 퀘스트 제목은 <피라미드 송>이다. 퀘스트의 제목이 라디오헤드의 곡 제목이기도 하고 내용에 있어서도 그 유명한 뮤직비디오를 노골적으로 오마쥬한다.인데, 지연된 즐거움을 주는 소소한 대화 선택지가 있다. 댐 건설로 수몰된 고향 마을로 다이빙해 들어가는 내용의 퀘스트 도입부에서 주디의 다이빙슈트가 잘 어울린다고 칭찬하면 ‘맥스텍 유니폼을 입은 모습을 봐야 하는데‘라고 한다. 그런 것도 있냐고 물으면, 내기에서 땄고 아직 옷장에서 적절한 때를 기다리고 있다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인다.

별 의미없이 주고받은 농담같지만, 한참 후에 주디의 집에 가보면 실제로 맥스텍 유니폼세트를 찾을 수 있다. 물론 다이빙슈트 핏을 칭찬하지 않고 넘어갔다면 맥스텍 유니폼도 없다. 이런 게 CD Projekt RED의 유머감각일 것이다.

주디는 V와 함께 다이빙하는 경험을 브래인댄스로 녹화하고 싶어 한다. 다만 이번에는 두 사람의 뇌가 연결된 채 같이 녹화한다는 점이 다르다. 이런 특수한 설정 때문에 V는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물속에서 주디가 떠올리는 어린 시절 기억을 마치 자신의 기억처럼 감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조부모 슬하에서 자란 주디가 어린 시절 또래들로부터 따돌림받았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주디가 숨겨놓은 인형도 찾게 되는데, 주디가 일방적으로 좋아하던 친구의 인형이었다. 호감이 있지만 그 감정을 인정할 수 없어서 반대로 행동했던 것일까. V는 주디의 회상을 들으면서 생생한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물속의 성당에서는 어린 주디가 울림을 느끼기 위해 냈던 그 소리를 듣는다. 이후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V는 주디의 이미지를, 주디는 V의 이미지를 영원히 소유하게 된다. 육체적인 결합 이전에 감정과 감각의 결합이 우선했다.

또 다른 캐릭터인 팬앰에게도 독특한 연출이 준비되어 있다. 퀘스트라인의 끝부분에서 V와 팬앰은 바실리스크라는 이름의 군사 장비에 몸을 싣는데, 바실리스크에 설비된 감각 피드백 기술 덕택에 둘의 신경계가 하나로 얽힌다. 그로테스크한 조명이 비추는 좁은 조종석에서 두 사람은 상대의 감각을 자신의 것처럼 느끼면서 사랑을 나눈다. 이쯤 되면 “feel badly”라는 문법적 농담에 뼈가 생긴다. 기분에 대한 형용사가 아니라 감각하는 기능을 수식하는 부사가 필요해진다.

BD는 80년대의 상상력에 크게 기대고 있는데, 더글라스 트럼벌의 영화 <브레인스톰>에 등장하는 경험을 기록하고 재생하는 기술, 그리고 윌리엄 깁슨의 소설 <뉴로맨서>에 나오는 simstim(simulated stimulation) 장치가 큰 영향을 미쳤다. 비슷한 시기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도 자신의 잠재의식을 암호화키로 사용하는, 정신분석과 사이버펑크가 매시업된 느낌의 기술이 등장한다는 점도 언급해 두고 싶다.

제임스 캐머런이 각본을 쓰고 캐서린 비글로우가 연출한 1995년 영화 <스트레인지 데이즈>에도 이와 유사한 장비가 등장한다. SQUID라 불리는 이 장치는 로드니 킹 사건과 1992년 LA 폭동의 기억을 불러오는 세기말의 로스앤젤레스를 배경으로, 주로 스너프 디스크를 생산하고 유통하는 데 사용된다. 특히 희생자의 눈을 가린 채 스퀴드를 씌워, 폭행당하는 자신을 가해자의 시점으로 보도록 강제하는 시퀀스는 극도로 끔찍하다. 주인공 레니(레이프 파인스)는 이 디스크를 체험하고 나서 심각한 고통에 시달리는데, 이는 안전한 거리에서 폭력을 관음해 온 관객들을 향한 윤리적 힐난처럼 기능한다. 이 영화에서 스퀴드는 카메라의 극단적인 은유다. 스너프를 생산하는 미디어이면서, 동시에 부조리한 현실을 폭로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리리스가 남긴 기록은 무고한 흑인 셀럽을 살해하는 경찰의 폭력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증거로 작동하며, 영화는 이미지가 범죄의 공범이 될 수도, 진실을 드러내는 증언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사이버펑크 2077>에서 조니(키아누 리브스)는 V에게 아라사카의 미코시가 왜 나쁜지 묻는다. 미코시란 기업이 인간의 인격 구성체와 디지털화된 정신체를 수집해서 보관하는 데이터베이스, ‘영혼의 감옥’을 지칭한다. 게임 상에서 미코시는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영생의 프로젝트로도, 인격을 편집하고 조작하는 기술로도 그려진다. 이렇게 인격의 핵심요소가 디지털화되어 조작의 대상이 되는 세상에서 나의 존재는 무엇이 담보하는가? 데카르트 식으로 사유하자면, 감각은 속일 수 있고, 꿈과 현실을 구별하기 어렵고, 심지어 악마가 모든 믿음을 조작할 수 있다고 가정하면서도 완전히 의심할 수 없는 출발점은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게 의심하고 생각하는 자가 과연 나인가? 나의 사이버웨어에 복사된 다른 누군가의 정신체가 대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이버펑크 세상을 지배하는 기업의 입장에서는 하찮은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자본의 관점에서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인간으로서 노동자는 관심 대상이 아니니까.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노동 자체가 필요한 것이며, 심지어 노동을 제공하는 주체가 인간일 필요도 없다. 조니는 미코시를 테러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사이버펑크식 억압 구조에 균열을 만들려고 한다. 플레이어는 대부분 조니의 의지를 대리 수행하는 길, 미코시를 파괴하려는 싸움을 하게 된다.

푸엔테스의 <아우라>가 떠오른다. 광고를 보고 찾아간 노파 콘수엘로의 고풍스러운 집에서 그녀의 남편 요렌테 장군이 남긴 미완의 기록을 완성하는 일을 진행하게 된 젊은 사학자 펠리페가 주인공이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콘수엘로의 조카인 아우라와 만난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펠리페와 요렌테, 아우라와 콘수엘로의 이미지들이 혼란스럽게 겹친다. 이 몽환적이고 초현실적인 짧은 고딕 소설은 이인칭 시점으로 쓰여있다. 이 독특한 서술방식은 모든 문장을 최면술사의 주문처럼 만들고, 시간과 공간, 이성과 환상, 현실과 꿈, 산 자와 죽은 자 간의 경계를 점진적으로 무너뜨린다. 종국에는 ‘너’로 호명되는 존재가 펠리페인지 요렌테인지 다른 누구인지도 모호하게 된다. ‘너’라는 주어는 ‘나’와는 달리 본래 고정된 정체성이 없는 언제든 다른 대상을 가리킬 수 있는 빈자리가 아니던가.

<아우라>의 이인칭은 그래서 결정적이다. ‘너’는 언제나 호출되지만 결코 고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독자를 가리키기도, 인물을 가리키기도, 이미 죽은 자의 잔향을 가리키기도 한다. 사이버펑크의 세계에서 ‘나’가 데이터로 분해되고 기업의 저장소에 보관될 수 있다면, ‘너’는 오히려 마지막까지 붙잡히지 않는 대명사다. 미코시가 봉인하려는 것은 인격이지만, <아우라>가 끝까지 미끄러뜨리는 것은 정체성이다. 누가 생각하고 있는가, 누가 느끼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주어를 잃는다.

어쩌면 우리는 늘 이렇게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기억을 빌려 사랑하고, 누군가의 언어를 빌려 사과하며, 누군가의 시점으로 세계를 통과한다. 그럼에도 어떤 순간에는—물속의 성당에서 울림을 시험하던 어린아이의 목소리처럼—도저히 대체될 수 없는 감각이 남는다. 그것은 문법으로는 교정할 수 없고, 기술로는 완전히 포획되지 않으며, 이인칭으로 불릴 때 가장 또렷해진다. 결국 남는 것은 선언이 아니라 호명이다. 어느 순간 내 존재를 확신하기 힘든 순간이 올지라도, 누군가에게 불리고, 그 부름에 떨리듯 반응하는 순간만큼은 대체될 수 없다.

footnote
  • 1
    영어판 퀘스트 제목은 <피라미드 송>이다. 퀘스트의 제목이 라디오헤드의 곡 제목이기도 하고 내용에 있어서도 그 유명한 뮤직비디오를 노골적으로 오마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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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MW Turner

영국 화가 터너가 남긴 37,000여 점의 스케치북을 통해 그의 삶과 내면을 탐구하는 BBC의 다큐멘터리 <Turner: The Secret Sketchbooks> (링크는 가디언 리뷰).

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준 포르노그래픽 스케치들에 대해서는 초창기 메마른 성적 판타지가 소피아 부스와의 관계가 형성됨에 따라 따뜻하고 인간적인 에로티시즘으로 변화한다고 평한다. 타인과 깊은 관계를 맺는 데 어려움을 겪던 한 남자가 소피아를 만나면서 타인을 신뢰하고 그와 관계 맺는 법, 감정적 욕망을 친밀감과 통합하는 법을 터득한 것으로 보인다는 설명이다.

아버지의 죽음이 그에게 미친 영향이 컸던가 보다. <Death on a Pale Horse>에는 어떤 경계를 넘어서는 강렬함이 있다. 내가 매료된 터너의 작품들은 모두 이후의 작품으로 보인다.

경계는 흐려지고 사물의 외형은 녹아내리며 색과 빛이 형태를 잠식한다. 구도는 더 이상 인간의 안전한 시점에 복무하지 않는다. 그림 앞의 인간은 응시의 주체가 아니라 응시에 압도되는 또 하나의 대상이 되는 느낌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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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국수, phở

흥미로운 베트남 쌀국수의 기원을 찾는 여행 기록. 쌀국수의 기원지로 알려진 곳인 하노이에서 남동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남딘성 반꾸(Vạn Cú) 마을과 하노이를 오가며 취재한다.

“아니, 그건 조금 더 복잡한 얘기예요.” 응우옌이 말해 내게 의외를 안겼다. 나는 또 한 번의 반전이 이어질까 긴장했다. “퍼의 한 형태는 반꾸에서 시작됐지만, 실제로 형태를 갖춘 건 하노이예요. 반꾸 사람들 덕분이죠.” 퍼는 하노이에서 훨씬 더 맑은 국물과 적은 피시소스로 발전했다고 그녀는 말했다. 20세기 초에 많은 반꾸 사람들이 하노이로 이주해 왔고, 부자나 프랑스인들만 먹을 수 있던 소고기 쌀국수를 만들 기회를 보았다고 그녀는 덧붙였다. “오늘날 퍼는 모두의 음식일지 몰라도, 100년 전,” 응우옌은 말했다, “그건 부자들을 위한 요리였어요.”

그 말이 이해됐다. 퍼가 베트남 북부에서 시작됐다는 데에는 모두가 동의하지만, 정확히 어디서 비롯됐는지에 대해서는 영영 합의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퍼는 프랑스와 중국의 영향이 일부 섞이고, 여기에 베트남인의 기지와 자립심이 더해져 탄생한, 베트남의 복잡한 역사를 반영하는 음식이라는 것이다. 남딘 어딘가에서 시작되어 하노이에서 완성되었고, 이제는—그럴 만한 이유가 충분하기에—전 세계가 사랑하는 음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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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직박스

<문화/과학> 90호에 실린 서동진의 글 <인터내셔널!: 어느 노래에 대한 역사적 기억 연습>을 경유해 도달한 영상. 2012년 벨기에의 구 광산도시 헹크에서 열린 <마니페스타 9> 비엔날레에서 공개된 작품. 작은 골동품 뮤직박스가 마이크에서 마이크를 거치면서 증폭되고 전시장 외부의 대형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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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펑크

Cyberpunk Easy Mode에서는 사이버펑크로서 살아가는 규칙 세 가지를 제시한다.

  1. 스타일이 본질에 우선한다(Style over Substance)
  2. 태도가 전부다(Attitude is Everything)
  3. 엣지 위에서 산다(Live on the Edge)

엣지는 위험을 즐기는 자, 한탕주의자들이 가는 불분명한 곳이야. 엣지에서는 돈, 명성, 심지어 목숨까지 원칙이나 한탕만큼이나 모호한 것에 걸지. 사이버펑크로서 넌 행동 그 자체가 되길 원해. 반란을 일으키고, 불을 붙이고, 거대한 대의에 뛰어들고, 큰 문제를 위해 싸워. 빠르게 달릴 수 있는데 천천히 갈 이유가 없지. 위험을 정면으로 맞서고 피하지 않아. 너무 안전하게 놀지 마. 엣지에 헌신하는 거야.

영화 <Blade Runner>의 제목은 사실 윌리엄 S. 버로스의 단편 <Blade Runner: A Movie>에서 따온 건데, 그것 역시 또 다른 소설 앨런 E. 노어스의 <The Bladerunner>에서 가져왔다. 수술용 칼 따위의 불법 의료 장비를 운반하는 밀수꾼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니 말 그대로 “칼을 들고 달리는 사람”이었던 것. 하지만 리들리 스콧은 의미와는 상관없이 강렬하고 미래적인 느낌 때문에 이 제목을 차용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엉뚱하지만 탁월한 선택이었다. 칼날, 혹은 경계 위를 달리는 자 등으로 해석되면서 사이버펑크의 고전에 안성맞춤인 의미를 얻게 되었으니까.

지금까지 인류를 실망시킨 적 없는 CD Projekt RED의 <Cyberpunk 2077>을 최근 다시 플레이했는데 과도하게 몰입한 나머지 후유증을 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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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Ariel (1988)

오랜만에 재감상한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아리엘> 한 장면. 주인공의 아버지는 죽기 전에 작은 오르골이 딸린 자동차 키 고리를 물려주는데, 도시에 와서 오갈 곳이 없어진 그가 비로소 오르골을 돌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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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등석

테런스 쿠네오 <스토크턴-달링턴 철도의 개통식, 1825>

1825년, 테런스 쿠네오가 그린 〈스토크턴-달링턴 철도의 개통식〉 속 기관차가 끌고 있는 차량들은 우리가 아는 객실의 모습과 거리가 멀다. 스스로 달리는 기계에 열광한 사람들은 의자도 창문도, 지붕도 없는 객차 위를 점령한 채 환호하고 있다. 열차는 위압적이지 않다. 오히려 만만해 보인다. 주변은 경주를 벌이는 사람과 개, 말, 당나귀들로 북적거린다. 우리는 결말을 알고 있다. 혀를 내밀고 달리는 강아지가 귀여움으로는 우승이지만, 속도는 결국 증기기관차가 이긴다.

윌리엄 터너의 <비, 증기, 그리고 속도 – 대서부 철도>

윌리엄 터너의 1844년 작품 <비, 증기, 그리고 속도 – 그레이트 웨스턴 철도>1https://en.wikipedia.org/wiki/Rain,_Steam_and_Speed_%E2%80%93_The_Great_Western_Railway. 이 작품은 왕립 아카데미에 전시되어 관람객들을 충격에 빠뜨리는데 새롭게 도래한 기계 시대와 이전의 느린 삶의 속도를 대비한 그 강렬한 표현이 매우 극적이라는 반응을 얻었다. 그림의 대부분은 상호 침범하는 하늘과 땅, 비구름을 묘사하고 있다. 그림의 중심, 까마득한 과거 어딘가에서 관찰자의 시공간으로 뻗어오는 철로 위로 사선의 빗줄기가 내리친다. 모든 사물의 윤곽이 희미하지만, 철로 위를 질주하는 증기기관차의 굴뚝 만큼은 선명하다. 열차를 확대해서 보면 뜻밖의 디테일을 확인할 수 있다.2그림의 실제 크기는 91cm x 121.8cm 이다.

수년 동안 이 그림을 벽에 걸어 두고도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자세히 보면 지붕 없는 객차가 분명히 묘사되어 있다. 사람들은 비바람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으며 기관차가 내뿜는 연기를 피할 길도 없다. 1844년의 철도 여행, 특히 삼등석의 실상을 새삼 실감하게 되는 대목이다.

O.S. Nock3https://en.wikipedia.org/wiki/O._S._Nock의 책에서 발췌한 글이 당시의 삼등석 객차를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철도의 초창기 시절, 철도 회사는 삼등석 승객들이 여행하도록 장려할 의지가 거의 없었고 — 오히려 그 반대였다. 삼등석 승객들에게 제공된 좌석은 지붕도 없는 화물차였지만, 어디를 가고자 하면 걸어 다니는 것이 보통이었던 사회 계층에게는 한겨울이라 해도 개방형 삼등석 객차를 타는 것이 그리 큰 고생은 아니었다. 다만, 날씨를 견디는 대신 기관차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와 배기가스를 견뎌야 한다는 점이 달랐다. 이등석 승객을 위한 편의는 ‘일등석’과 ‘삼등석’의 중간쯤이었다. 객차 양옆은 열려 있었지만, 위쪽에는 지붕이 있어 어느 정도 날씨를 피할 수 있었다. 여행하는 습관이 점점 확산되고, 평생 한 번도 여행을 해본 적 없던 사람들이 철도를 타기 시작하자, 더 나은 삼등석 객차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바닥에 물이 빠져나가도록 구멍을 뚫어 놓은 객차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선로에서 일하는 인부들에게 빈 병을 던지는 난폭한 무리 이야기도 들린다. 열차 속도로 인한 돌풍에 모자를 날려버린 ‘애지중지하던 실크 해트’를 잃는 경우도 많았는데, 물론 철도에는 사등석이 없다는 이유로 항상 삼등석만 탄다는 어떤 성직자의 이야기도 있었다. 개방형 화물차 안에는 몇 개의 좌석이 있긴 했지만, 대개는 승객 수가 좌석보다 훨씬 많았고, 초기의 삼등석 열차는 승객들이 잔뜩 몰려 서로 몸을 부딪치며 서 있는 모습이 오늘날 런던 지하철 러시아워의 풍경을 연상시켰다.4https://victorianweb.org/technology/railways/p1.html

1등석
2등석
3등석

위로부터 일등석, 이등석, 삼등석.

철도는 민간 회사가 독점적으로 운영했고, 요금과 노선, 서비스 수준이 각기 달라 통일성이 없었다. 삼등석 객차는 지붕도 없는 화물차 개조형이었다는 문제 외에도 대부분 하루에 한두 번만, 그것도 불편하고 느린 시간대에만 운행되었다. 다른 도시로부터 자유롭게 노동력을 공급받고자 하는 자본의 요구, 그리고 차티스트 운동 등 정치사회 개혁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저렴하고 인간다운 철도 여행 요구가 커졌고, 1844년 철도 규제법(Railway Regulation Act)이 제정된다. 이에 따라 개방형 객차는 금지되고 지붕과 측면 벽, 그리고 좌석이 필수가 된다.

오노레 도미에, 3등석 객차

오노레 도미에가 1860년대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삼등석 객차>. 딱딱한 나무 의자가 놓인 좁고 더럽고 개방적인 객실로, 이등석이나 일등석 표를 살 여유가 없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고 묘사되고 있다.

아카마츠 린사쿠, Railway car by night

아카마츠 린사쿠가 1901년 그린 메이지 시대의 삼등석. 어둠이 아직 완전히 걷히지 않은 새벽, 낡은 목제 객차 안은 묵직한 공기와 함께 천천히 흔들리고 있다. 창문 밖으로는 잿빛 여명이 스며들어, 나무 프레임과 빛바랜 시트 위로 가느다란 은빛 결을 깔아놓는다. 객석에는 인생의 여러 결이 앉아 있다. 잠과 깨어남, 피로와 기대, 무심함과 기다림이 겹겹이 포개져 있는 작은 세상.

러시아 혁명 이후 소비에트는 ‘모든 객차는 인민의 것’이라는 슬로건 아래 형식상 등급 차별을 철폐한다. 그렇다고 모든 객실이 똑같을 수는 없었는데, 국토가 방대하기 때문에 침대차를 도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30년대에는 침대차(스파르니 바곤), 4인실(쿠페), 좌석형(플라츠카르트) 등 편의성에 따른 구분이 정착된다. 오늘날 러시아의 객차 체계도 이를 계승하고 있는데, 여행안내서를 보면 각각을 일등석, 이등석, 삼등석으로 무심하게 묘사하고 있다.

8, 90년대 우리에게는 비둘기호가 있었다. 백무산은 이런 시를 썼다.

새마을호는 아주 빨리 온다
무궁화호도 빨리 온다
통일호는 늦게 온다
비둘기호는 더 늦게 온다
새마을호 무궁화호는 호화 도시 역만 선다
통일호 비둘기호는 없는 사람만 탄다
새마을호는 작은 도시 역을 비웃으며
통일호를 앞질러 달린다
무궁화호는 시골역을 비웃으며
비둘기호를 앞질러 달린다
통일쯤이야 연착을 하든지 말든지
평화쯤이야 오든지 말든지

누구를 태우고 얼마나 빨리 달리며 어디에 서느냐가 결국 누가 어디서 살고 어떻게 대우받는가와 맞물려 있다는 사실을 간결한 언어로 드러낸다. 사회적으로 빠른 통로를 확보한 자들이 시간, 노동, 기회가 느리게 흐르는 사람들을 언제나 앞지르고 그들을 비웃는다.

footn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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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파시스트 체제는 공포를 먹고 산다. 공격, 침입, 접촉, 관통, 혼합에 대한 공포. 파시즘은 벽을 세우고 국경 통제를 강화하여 타자의 구체적 물질성이 국가라는 추상적 몸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불법적으로 침입해 내 세상의 모든 요소들과 즉시 뒤섞여 이 세상이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없게 한다. 얼음은 녹고, 물은 땅속으로 스며들고, 사랑은 벽을 뚫고 불법 체류자들과 함께 세상의 경계를 넘나든다.1Oxana Timofeeva, 「Love

footnote
  • 1
    Oxana Timofeeva,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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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e

기술자본의 집단소유

그렇다면 체제를 무엇으로 바꿔야 할까? 그것은 바로 ‘1인 노동자 = 1주식 = 1표’ 원칙에 기반한 새로운 기업 구조다. 이는 공적 기금이나 실체 없는 소유주에 의해 움직이는 법인들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젊은 세대에게 진정한 영감을 줄 수 있는 의제다.

마지막으로, 마르크스의 통찰은 빅테크와 거대 금융, 그리고 국가가 협력하여 우리를 몰래 가둔 ‘기술봉건제’ 세계를 이해하려 할 때 더욱 빛을 발한다. 이 체제가 감시 자본주의보다 더 악질적인 형태임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마르크스처럼 사고해야 한다.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을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자본의 돌연변이—즉 클라우드 자본—으로 봐야 한다. 이 클라우드 자본은 우리 행동 자체를 조정하고 있으며, 경이로운 과학적 돌파, 신경망, 상상을 초월하는 인공지능들이 만들어낸 이 세계에서, 사유화와 사모펀드가 주변의 물리적 자산을 수탈하는 동시에, 클라우드 자본은 우리의 뇌를 수탈하고 있다.

우리는 마르크스의 렌즈를 통해서만 진실을 파악할 수 있다. 개인이 자신의 정신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집단적으로 클라우드 자본을 소유해야 한다.1야니스 바루파키스, “2025년에 마르크스가 왜 필요한가?

footn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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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log Film

밀레니엄 너드

2000년 5월의 마지막 주에 방영된 ⟪퓨처라마⟫ 에피소드는 ⟨Anthology of Interest⟩. 프라이는 그가 냉동 캡슐에 빠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해 했고, 판스워스 박사의 What-If Machine은 1999년의 시공간에 남은 프라이의 현실을 들여다 본다. 그는 여전히 피자 배달부로 살아가며, 로봇과 외계인이 뒤섞여 사는 미래 대신 90년대 말의 지루한 삶을 이어간다. 하지만, 미래의 그 자신이 존재하지 않게 되어 퓨처라마의 시공간에 균열이 생긴다.

퓨처라마 시즌2 에피소드20, 프라이가 냉동 캡슐에 들어가지 않아 시공간에 균열이 생긴다

이를 피자가게 단골이었던 스티븐 호킹 박사 — 호킹의 목소리 연기는 실제로 호킹 박사가 했다 — 가 눈치채는데, 그는 사실 우주의 시간-존재 균형을 지키는 위원회의 멤버였다. 그는 프라이 때문에 생긴 균열에 “호킹 홀”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어한다.

위원회는 프라이를 납치하여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들을 대놓고 너드라고 부른다.

앨 고어. 마찬가지로 앨 고어 본인이 직접 목소리 연기를 했다. 앨 고어는 환경보호자로서 우주의 붕괴에 반대한다는 입장이다.

퓨처라마 시즌2 에피소드20, 앨 고어

니셸 니컬스. 트레키들의 우상, 우후라 역시 본인이 직접 등판한다.

퓨처라마 시즌2 에피소드20, 우후라

던전 앤 드래곤의 창시자 개리 가이객스가 등장하여 모든 문장을 끝맺기 전에 주사위를 굴린다. 그는 프라이에게 “+1 메이스”를 무기로 건넨다.

퓨처라마 시즌2 에피소드20, 개리 가이객스

IBM이 만들어 체스게임에서 인간을 이긴 체스 특화 인공지능 딥 블루가 인턴이라며 소개된다. 목소리 연기는 트레스 맥닐이 담당했다. 앨 고어는 그(녀)에게 모든 임무가 체스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언제가는 이해하게 될거라고 조언한다.

퓨처라마 시즌2 에피소드20, 딥 블루

이 짧은 이야기는 프라이가 냉동 챔버를 파괴하여 미래의 자신을 죽여버리는 패러독스를 만들어냄으로서 현실을 붕괴시키는 결말로 이어진다. 우주는 소멸하고 너드들만 남는다. 그들은 기꺼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영원히 던전 앤 드래곤을 즐기기로 한다. 앨 고어는 열 번째 정도 수준의 부통령이 되겠다고 한다.

퓨처라마 시즌2 에피소드20 결말

대략 이십여 년 만에 다시 보는 것 같다. 90년대의 너드들이란 다소 소외된 주변인이었고 조롱과 희화화의 대상이었다. 컴퓨터와 인공지능, 과학 같은 따분한 공부를 하고, 집구석에서 던전 앤 드래곤을 즐기며, 스타트렉과 같은 서브컬처에 몰입하면서, 환경 문제에 목소리를 내는 성가신 존재들이었다. 노스텔지어와 자학적인 개그로 가득한 상징들을 보고 있자니 새삼 세월을 감각하게 된다. 90년대의 그 너드들이 오늘날의 빅테크 산업을 이끌어 가고 있으며, 그들이 즐기던 코믹스와 애니메이션이 블록버스터로, 가장 잘 팔리는 문화상품으로 끊임없이 재탄생하고 있다. 그들은 핍진한 전문가이자 문화 주도층이 되었다.1오늘날 너드의 이런 ‘성공’은 기술에 대한 무비판적인 숭배, 인터넷-정보에 대한 맹신, 디지털 혁신을 자연스럽고 중립적인 힘으로 환상화하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내다.

옆집 이장네 부부에겐 세 아들이 있다. 큰아들이 중학생인데 아직도 컴퓨터를 잘 못 다루는 것 같다며 나에게 좀 가르쳐 줄 수 없겠냐고 물었다. 간단하게 답을 줬다. 컴퓨터로 게임을 할 수 있게 허용하라고, 컴퓨터로 마음껏 게임을 할 수 있다면 알아서 준전문가가 될 거라고. 그게 너드들이었다. 아무 쓸모없는 짓에 시간 낭비를 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런 “+1 메이스” 하나를 마음속에 품고 살아야 인생 아니겠나. 판스워스 박사가 이 에피소드 마지막에 자조적으로 중얼거린다. “사람은 꿈을 꿀 수 있지.”

footnote
  • 1
    오늘날 너드의 이런 ‘성공’은 기술에 대한 무비판적인 숭배, 인터넷-정보에 대한 맹신, 디지털 혁신을 자연스럽고 중립적인 힘으로 환상화하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