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자매지로 창간된 <크리티크M>를 들추니 이른바 NFT 아트에 관한 칼럼이 눈길을 끈다. NFT 어쩌고 하는 수 많은 비전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는 차에 호크니가 NFT 아트 투자에 앞장 선 사람들을 “국제적인 사기꾼”이라고 단정짓는 대목을 만나니 반갑기도 했다. 그러니까, 여러 장의 사진을 짜깁기한 300메가바이트의 JPG 파일에 블록체인 기술을 적용해서 수백억 원에 팔았다는 건데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위화감이 사라지지 않는다.
![Everydays](https://justhurd.net/wp-content/uploads/2022/05/everydays-1024x507.png)
NFT 아트가 그저 이미지 파일이 아니라 예술작품으로 평가받으려면 오프라인 공간과 확연히 변별되는 의미를 창출해야 한다고 말한다.
단순히 오프라인 세계를 모방하는 시뮬라크르(Simulacre)에 그치지 않고, 그 자체로 의미와 진실을 추구함으로써 이전에 없던 세계를 창조해야 한다. 물론 그에 따르는 디지털 문해력, 틈새에서 발견될 또 다른 불평등도 대비해야 할 테다.
<<크리티크M>> 창간호, <비대면 시대>, 예술의 새로운 시도, 김지연, 25p.
코인의 거래시장은 현실 주식시장의 퇴폐적 측면을 일차적으로 모방하는 시뮬라크르인 것 같다. 최근 발생한 루나-테라 코인 사태는 그 모방된 욕망의 파국을 암시하는 게 아닐까. 그리고 해당 글과 멀리 떨어진 다른 글에서 어떤 통찰을 얻은 기분이 드는 건 착각일까.
오늘날 영화 예술은 조직적으로 평가 절하되고, 소외되고, 비하되면서 ‘콘텐츠’라는 최소한의 공통분모로 축소되고 있다. 15년 전만 해도 ‘콘텐츠’는 영화에 대한 진지한 대화를 나눌 때나 들을 수 있는 단어였으며, ‘형식’과 대비되고 비교되는 의미로만 쓰였다. 그런데 그 뒤로 예술형식의 역사에 대해 전혀 모르고, 심지어 알려고 하지도 않는 이들이 미디어 회사를 인수하면서 점차 ‘콘텐츠’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했다.
<<크리크M>> 창간호, <펠리니와 함께 시네마의 마법이 사라지다>, 마틴 스코세이지, 177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