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보예 지젝은 최신 에세이1The Double Life of Veronique: The forced choice of freedom에서 소명(vocation)과 평온한 삶 사이의 윤리적 선택에 관하여 논한다.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을 경유하는 분석이 매우 흥미로운데, 사랑과 소명에 관한 언급을 인용해 두고 싶었다.
그렇다면 만약 내가 격렬히 사랑에 빠져 있으면서 동시에 어떤 (과학적, 정치적, 예술적) 대의(Cause)에 절대적으로 헌신하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장 최악은 대의에 대한 헌신을 희생하고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 경우, 나는 사랑 자체마저 잃게 될 것이다. 상대방에게 나약한 존재로 비칠 것이고, 결국 연인으로부터 버림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사랑의 궁극적 시험은 연인이 나를 버리더라도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음을 내 연인에게 증명하는 것이다. 오직 그 경우에만 나는 사랑받을 자격을 얻게 된다. 유일하게 진정한 결정은 사랑을 포기하고 대의에 우선순위를 두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내가 감당하기에 너무 벅찬 일로 판명된다면, 나는 자살을 택할 뿐이다. 여기에는 타협의 여지도 없고, 제3의 길도 없다.2같은 글
지젝에게 사랑이란 일종의 ‘악’이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순간 그 사람은 나에게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한 절대적 존재가 되며, 평온한 우주의 질서에 구멍을 낸다. 사랑 그 자체를 유일한 소명으로 삼으면, <폭풍의 언덕>의 히스클리프처럼 파괴적인 집착과 복수심에 사로잡히게 되어 연인과 자신 모두의 세계를 파멸로 이끌게 된다. 사랑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서는 대의(Cause)라는 버팀목이 요구된다. 진정한 사랑은 대의를 위해 사랑을 버림으로써 이룰 수 있다.
footn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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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같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