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zy view: 멋진 신세계 - ≪銃夢≫, ≪Cafe Alpha≫
# by 졸린고양이 @ Thu Nov 14 00:00:00 2002, 8 years ago
헉슬리가 바라 본 미래는 "멋진 신세계"였다. 물론, '멋진'이라는 형용사가 담고 있는 차가운 조소는 몇 페이지만 넘겨봐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미래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말할 것도 없고, SF 소설, 만화 등 그의 디스토피아가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할 수 있겠다. Ridley Scott의 'Blade Runner', 'Alien', Terry Gilliam의 'Brazil', '12 Monkeys', Andrew Niccol의 'Gattaca' 등등.
현실을 딛고 있는 인간이 그려내는 미래는 현재의 모습을 담고 있을 수밖에 없다. 상상 속의 동물들 - 용이나 일각수 등 - 이 사실은 실재하는 동물의 특징들을 교묘하게 조합해 놓은 것에 다름아니라는 사실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미래의 모습이라고 묘사하고 있는 모든 그림들은 동시대의 모습, 또는 그 특징들을 희화화하거나 과장하여 조립한 것에 다름아니다. '에일리언'의 미래사회는 다국적 기업이 지배하는 고도로 발전한, 그리고 여전히, 자본주의사회인 것이다. 미래를 우울하게 보는 사람은 결국 현실 속에서 우울함을 보고 있다는 말이다. 그 우울한 현실이 내일이면 결국 미래가 될테니까.
만화 '銃夢'(키시로 유키토, 木城 ゆきと 作)이 그리고 있는 미래 역시 그리 희망찬 모습은 아니다. 현실세계의 대도시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빈민굴을 닮은 비정의 거리 '고철마을'과 그 '고철마을'의 희생을 담보로 번영을 누리고 있는 '자렘'이라고 하는 공중도시가 등장한다. 이렇게 분열된 현실을 배경으로 기억을 잃어버린 여전사 '갈리'가 '이도(Ido)'라는 자렘 출신의 의사에게 발견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주로 '고철마을'을 무대로 진행되는 초반부의 에피소드들은 느리면서도 드라마틱하다. 자신의 정체성, 실존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갈리의 노력이 치밀한 과학이론적인 배경, 섬세한 매카닉 묘사, 생생하고 역동적인 커트들, 심금을 울리는 매력적인 대사들과 어우러진다. 미리 경고해두자면, 이 만화는 성인을 대상으로한 만화다. 일본의 성인만화잡지 '비즈니스 점프'에 1990년부터 1995년까지 연재되었고, 폭력묘사는 하드코어에 가깝다. '고철마을'의 드라마들은 후반부로 가면서 '자렘'의 드라마들로 바뀌고, 갈리의 정체성 찾기 여행은 '인류'의 정체성을 찾는 여행으로 확장된다. 정교하게 제작되어 기억까지 가지고 있는 사이보그와 살아있는 인간을 무엇으로 구분하는가, 인간은 도대체 무엇으로 규정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들이 곳곳에서 제기된다.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떠나는 '갈리'의 여정들이 결국 어디에서 어떻게 끝맺게 될 것인지, 종국에 가서 과연 어떤 해답을 얻을 것인지, 이러한 궁금증이 유발하는 묘한 긴장과 흥분 때문에 좀처럼 손에서 책을 놓기 힘들다.
처음의 의욕적인 출발에 비해 뒤로 가면 갈수록 다소 억지스럽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게 이 작품의 치명적인 단점일 것이다. '자렘'의 비밀은 충격적이지만 어딘지 허무하고 작위적이다. 전반부의 풍부하고 깊이있는 캐릭터 '갈리'는 점차 전투기계로 변해간다. 참고로, 이 작품은 영어권에서는 'Battle Angel Alita'로 알려져 있는데, '銃夢'이라는 원제에 비하면 얇팍하기 그지없다. 물론, 이 작품의 지면은 80%정도 전투장면으로 채워져 있다. 또, 모든 에피소드들은 전투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모든 갈등은 전투로 해소된다. 그렇다고 해도, '고철마을'에서 벌어지는 '유고'라는 인간소년의 드라마, '갈리'가 그 소년과 나누는 애뜻하고 비극적인 사랑, '갈리'에게는 아버지와 같은 '이도'와의 끈끈한 우애가 하모니를 이루며 협연하는 감동의 교향곡이 언제인지 모르게 Keith Jarrett류의 지리하고 아방가르드한 피아노 독주로 바뀌어 버린 점은 유감이라 아니할 수 없다. 다만, 후반부로 가면서 점차 무게를 가지게 되는 캐릭터 '노바' 박사를 통해 인간의 존재론적 탐구에 천착해 들어가는 작가의 노력만큼은 찬사를 받아 마땅하다.
이 작품은 오토모 가츠히로의 '아키라'와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를 잇는 일명 사이버펑크의 주류에서는 한 걸음 비껴 있지만 암울한 디스토피아의 미래세계를 통해, 현실의 암울하기 그지없는 부조리들을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는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여전히 매력적이지만 독창적인 것은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전공투운동이 좌절되고 일본공산당이 와해되어버린 70년대 초반에 대학을 다닌 작가들의 시선에 포착된 현실은, 아직도 여전히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차 있고 혁명이 불가능한 현실이다. 현실속에서의 '전복'이란 불가능한 것이다. 세상의 끝, 하드보일드한 원더랜드에서 작가란 인간들이 설 수 있는 곳은 '숲'이다.
'銃夢'의 사이버펑크를 남성적인 것, 애니무스(animus)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90년대 중반 이후에 등장하기 시작한 새로운 주류를 애니마(anima)적인 것이라 부를 수 있을까. 적어도 아시나노 히토시(芦奈野 ひとし)의 만화
주인공 '하쯔세노 알파'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인간이 아닌 사이보그(인간형 로봇)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가장 인간적이다. 인간처럼 나약하며 눈물이 많다. 그녀는 '내 눈물은 원래 눈을 적시기 위한 것 뿐인데'하면서도 번개에 맞아 다친 자신을 병원에 데려다준 할아버지에게 고마워한다. 그의 주인은 어디론가 떠나버렸고, 그런 그를 언제까지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기에 그녀 혼자 주인을 기다리며 주인의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는 설정이다. 카페를 운영하고는 있지만 한적한 시골 카페에 찾아 올 손님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 커피의 대부분은 그녀가 마셔버린다. 그녀는 자신이 로봇이라는 점에 전혀 개의치 않고 살아간다. 이러한 그녀를 둘러싼 주변의 여러 인물들, 조금씩 성장해가는 소년 '타카히로', 자신이 로봇이라는 점에 늘 근심하며 살아오던 '코코네', '타카히로'의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 등등을 둘러싼 사소하고도 개별적인 이야기들이 에피소드들을 만들어 낸다. 큰 사건이라고 할만한 것들이 없기 때문에 '기승전결'로 이야기를 분해하는 일따위는 필요치 않다. 여백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살린 개별 커트들은 한편으로는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방식으로 분할되어 있지만, 그러한 개별 커트들의 진행은 지독하게 느리고 단조롭다. 마치, 이 작품의 캐릭터들처럼 '시간의 흐름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빔 밴더스의 '파리텍사스'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파리텍사스와 같은 매혹적인 배경음악은 없지만, 이 만화를 보다보면 상냥하고 감성 풍부한 로봇 '하쯔세노'가 가끔 연주하는 비파소리가 들릴 것 같은 기분이 된다. 어쩌면 작가는 시인 안도현처럼 '아무 것도 아닌 것'에서 아름다움을 보는 능력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이란 과연 어떤 모습일까? 그 현실 속에서 어떤 미래를 볼 수 있는 것일까?
현실의 풍경들에서 우울한 전조들을 보는 사람들은 미래를 디스토피아로 보았다. 극속도로 발전하는 과학기술문명에도 불구하고 구조적으로 소외될 수밖에 없는 개인, 무한 자유의 깃발처럼 여겨졌던 정보화의 물결 속에서도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의 부재를 실감하게되는, 더군다나 현실의 역사적인 실험들이 소비에트의 몰락과 함께 백지화되어버려 정처없이 해체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현실의 풍경은 사이버펑크로 표상되는 암울한 디스토피아였을 것이다.
'카페 알파'는, 물론, 암울한 디스토피아의 세계를 그리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헉슬리의 비인간적인 '멋진 신세계'와는 정반대의 세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로봇은 인간과 대립하는 것이 아닌 인간사회의 긍정적이고, 어쩌면 적극적인 일부분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역으로 인간이 로봇과 대립하는 것도 아니다. 인간 역시 매우 인간적이고 따뜻한 존재다. '카페 알파'의 미래는 그럭저럭 살아갈만한 미래다. 하지만, 기묘하게 모순되는 여러가지 설정들, 이를테면, 로봇기술은 매우 정교하고 고도로 발전해 있지만 비행기조차 구경하기 힘든 미래 상황, 이런 설정들로 마치 역사라는 것이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모든 것을 스스로 '망각'해버리는 능력을 지닌 것처럼 보이게 한다. 일본 열도가 지속적으로 침몰해가서 지금은 요코하마의 언덕배기에 사람이 몰려 살고 있다는 설정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결국 '카페 알파'에서도 인류란 멸망해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페 알파'는 많은 부분에서 설명해야 할 것들을 설명하지 않고 있다. '설명'이란 것이 때로는 무의미하기 때문일 것이다. 희망적이고 가슴벅찬 현실인 것만은 아니지만, 그런 것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아주 작아서 잘 보이지 않는 개개인의 현재의 삶이다. 그 대부분의 개개인들은 그저 '시간의 흐름'에 자신을 내맡기고 느리고 단조로우면서도 그다지 극적이지 않은 삶을 즐기는 것이다. 이제 현실은 거시적인 것이 아니라 미시적인 것이 된다.
'銃夢'의 후속편이 나왔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게되었다. 서울문화사에서 정식출판한 책에는 '총몽 - Last Order'라는 거창한 제목이 붙어있다. 여기서도 물론 '갈리'가 등장한다. 다만, 전작과 미묘하게 다른 논조의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다음은 '갈리'의 대사다.
"살아 있다는 것엔 의문이 따르지.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부터 그 의문을 가슴속 깊히 안고 살아가. 어떤 사람은 그 의문을 깨닫지 못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 의문에 직면해 방황하면서... 그리고 의문을 지닌 채 생을 마감하는 거야. 그 의문은 답을 구하는 자에겐 '저주'이지만, 행동하는 자에겐 '축복'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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