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나는 그의 전화를 받아들었을 때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형, 이게 얼마만이야, 내 목소리 기억해? 그렇게 대뜸 달려드는 어느 낯선 남자의 목소리는 당황스럽기 마련이다. 어, 누구더라...? 피곤하니 수작은 그만두고 정체를 밝히라는 소린데, 상대방은 여전히 흥분하며 외친다. 나야, 나! 그와 악수를 나누며 그 따위 얘기를 건넬 수는 없다. 서로 다르게 기억하고 있는 과거를 조금씩 양보해 가며 술잔을 기울일 뿐이다. 함께 보낸 시간이라해도 누구에게나 서로 다른 버전의 추억이 있는 거다. 그가 얘기하는 추억의 일부는 나에게 공백으로 남아있다. 오래 전 학교 앞 자취방에서 나누던 얘기들, 그 때 함께 겪었던 구질구질한 일들. 어줍잖은 삼각관계.
그를 보내고 나서, 통화기록을 열어 번호를 저장하려 했는데 도무지 그의 성이 기억나지 않았다. 이름만 적어 넣었다. 친한 사이끼리는 이름만 적어 넣기도 하니까. 친한 후배를 부르면서 성까지 부르는 건 좀 웃기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니 편했다. 기억이란 입력(encoding), 저장(storage), 인출(retrieval), 이렇게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녀석의 성이 입력 단계에서 누락되었거나 입력은 되었는데 저장이 안 되었다기 보다는 머릿속 어딘가에 저장은 되어 있으나 검색이 안 되는 거겠지. 흔히 생기는 일이다. 얼마 전 선배가 농담처럼 한 소린데, 나처럼 록큰롤만 들으면 늙어서 치매에 걸린단다. 한 때 모든 걸 다 주어도 아깝지 않았던 누군가의 성이 기억나지 않는 건 힙합 같은 위대한 음악을 쓰레기 취급해 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요새는 술을 마셔도 잘 취하지 않는다. 그건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다. 모두가 젊어지고 있는 가운데 나 혼자 늙는 기분이랄까. 집에 돌아와서 토미와 어구리에게 닭가슴살을 주고 녀석들의 화장실을 청소하고 찬물로 샤워를 했다. imdb를 잠시 둘러보다가 자꾸 모니터를 가리는 토미에게 궁디팡팡을 해 준 후에야 취기가 올라왔다. 성은 기억나지 않지만, 토끼 같은 아들 둘이 잘 크고 있으며 요새는 체중을 70킬로그램 이하로 줄이는기 위해 열심히 운동을 한다는 다 큰 사내가 눈물을 보였을 때, 몇 년 전 스스로 목숨을 끊은 누군가의 얘기를 하다가 닭똥같은 눈물을 훔칠 때, 뭐라도 말을 해야했다. 아니면 취한 척이라도 해야 했다. 그도 저도 아니라면 성이 뭐냐고 묻기라도 했어야 했다.